제2권




꿈이 있는 田園















본지는 농촌생활 개선을 위해 일하는 지도자들의 문예 수기집입니다.






차  례

 

 

 

권두언

  우리 모두 소중한 꿈을 키웁시다 (차영준)

       /사진의 세계

▧ 초대시/산행 외 1편 (정홍도)

 

▧생활개선 지도사례

  작은 일에 보람을 (이옥순)

  새 시범마을을 접한 소감 (고영란)

  ‘여성의 집’을 지도하고 (이혜경)

  도배기술교육을 하고나서 (박효진)

  지도사업! 이럴 때 보람을 (박근숙)

  농촌 환경오염 실태조사를 마치고 (고윤자)

  생활개선 시범마을 교육을 마치고 (이명희)

  아직도 우리에겐 소중한 것 (오혜림)

  마르지 않는 꿈 (양순미)

  “배나무골 아낙네”를 발간하고… (이순희)

 

▧부녀자 생활수기

  농촌여성 일감갖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김현숙)

  병아리의 합창 (최지태)

  어느 시골아낙의 소박한 소망 (윤옥순)

  하우스에서 날이 새고 저무는 삶일지라도! (신해숙)

  촌부의 아내 (최금숙)

  절약과 봉사정신의 참교육 (정경숙)

  가계부 기록의 보람 (한하숙)

  쓰레기! 이대로 좋은가 (이선자)

  작은 실천 (박순님)

  몸소 실천해서 얻는 큰 기쁨 (이경희)

  4대를 지키는 가장 (김달막)

  젖소엄마의 꿈 (권경숙)

  절약 너무 아름답다(윤혜정)

  앞서가는 금천 생활개선부(김점숙)

  배우며 호흡하며 사는 세상(이광희)

  내 나름대로 (주경아)

  우리 마을의 ‘자랑 마을공동휴식터’ (장옥련)

  아픔을 덜어주는곳 (이영자)

  촌부의 삶 (표수선)

 

▧ 시

  인고의 당신 (최용환)

  남편의 빈자리 (박명자)

  미래에 대한 작은 기대 (윤인숙)

  유 자 향 (차남례)

  내일을 기다리며 (최정님)

  느      낌 (김난희)

  천년세월 푸른솔아 (전인덕)

  들녁에 서서 (윤인숙)

  농      부 (김명화)

  바다 ___ 그 고요 (이화석)

  농군의 아내 (배성희)

  아      침 (엄혜경)

  가      을 (하영득)

  농군의 모습 (이시자)

 

  독후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주봉길)

  서 간/ 친구에게 (김명숙)

          아들에게 (임인자)

          존경하는 선생님께 (문공주)

 

▧ 수필

  봄의 생활예찬! (김정순)

  흙의 모정 (이말순)

  명희, 명금, 안숙이의 우리집 (전현숙)

  푸른 꿈을 쫙 (나수진)

  사람사는 농촌을 꿈꾸며 (서현숙)

  이      사 (정공례)

  실수 한 토막 (최영아)

  나 혼자만이라도... (최말순)

  잃어버린 생일 (황혜영)






 ▧ 권두언

 

우리 모두 소중한

꿈을 키웁시다

 

 

 

 

 

 

  오늘의 농촌을 가꾸는 여성의 삶은 가사 수행 및 자녀 양육 등 전통적인 가정주부의 역할 뿐 아니라, 농업 생산에서의 지배적인 역할은 물론 지역 사회 주민으로서 여성의 사회 활동 참여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밤낮으로 바쁘게 일에 쫓기어 살아온 생활속에서도 잠시 잠시 펜을 들어 가정에서, 일터에서, 비닐하우스 쉼터에서 적어 내려간 꿈의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보았습니다.

  젊은 시절에 반드시 가져야 할 소중한 꿈들을 그려보기도 하고 좌절과 고통을 이겨낸 삶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

  그 꿈을 키워가는 사람은 희망이 있어 보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 꿈 때문에 삶이 더욱 빛나고 그 꿈이 있어서 인생의 미래를 바라다 보고 열심히 뛸 수 있는 것입니다.

 

 

  농촌 여성은 명실공히 농촌 지역 사회의 주인입니다.

  민주 시민으로서 자신의 문제 해결에 임하는 자세를 가지듯 농촌 주민의 생활 향상은 물론 농촌 여성 삶의 발전 등 여성이 사회의 주인으로서 의식을 확고히 하면서 주체적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꿈이 있는 전원은,

  소중한 꿈을 키우기 위해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고 앞날을 계획해 보는 지혜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진솔한 삶의 표현과 아름다운 꿈을 모은 생활개선부원들의 주옥같은 글들이 널리 익혀지고 친숙한 느낌을 가져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보람 있는 삶을 위하여

  우리 모두 소중한 꿈을 키웁시다.

 

 

1992.  12.

 

 

전 라 남 도 농 촌 진 흥 원 장

차   영   준

 




사진의 세계

동심ㆍ농촌진흥원 김 용 수


형벌ㆍ무안 진 종 옥


쥐불놀이ㆍ나주군 박 문 규


첨단의 농업ㆍ보성 최 낙 용


대나무골의 스케치ㆍ담양 정 병 선


알알이 영근 꿈ㆍ영암 이 운 기


농업의 신비ㆍ보성 장 채 운




 

초 대 시

 

 

산행(山行)

 

정  홍  도

 

밤새 울던 산뎅이는

아침 안개로 젖은 눈물을 닦고

계곡따라 흘러 꿈틀거리는 백사(白蛇)는

이끼의 혀를 적시는데

해묵은 낙엽은

이별의 아쉼 태우지 못하고

행인의 발아래 울기만 한다.

 

산(山)노래에 허기진 나는

행여 하는 욕심에

오월의 숲에 낚시를 드리우고 입질을 기다리다

잡동사니 사심(蛇心)은 오수의 늪에 헤맨다.

 

장끼 한 마리 날개를 치며

울어대는 사연에 빈망태 걷우고

마지막 남긴 진달래 꽃잎

잘근 잘근 되새김에 두 가랭이는 도심의 숲속으로 휘청인다.

 

[제11회 문학예술 신인 당선작/사(현재 농촌진흥청 재직)]

 

 

초 대 시

 

 

농(農)2

 

정  홍  도

 

알 몸뎅이로 줄지어 지난 겨울에도

날 무딘 칼로 몸 잘리우는

지금 같지는 않았다오.

 

태양이 지구를 먹어대는

오뉴월에도

바위를 뚫어 물을 빠는

지금같지는 않았다오

 

살찐 여인의 젖통에서

이녁의 젖비린 냄새가

익숙해지는 지금 같지는 않았다오.

 

호박꽃, 오이꽃, 배꽃, 사과꽃이

소슬한 바람에도 경기를 일으키고

여인의 눈자위 위의 아이라인처럼

파리한 얼굴로 웃어야만 하는 지금 같지는 않았다오.

 

[제11회 문학예술 신인 당선작/시(현재 농촌진흥청 재직)]

 






 

 ▣ 생활개선 지도사례

 

 

 

작은 일에 보람을

 

 

 

이 옥 순

담양군농촌지도소


  생활지도사로서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일들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단 몇개월 동안의 사업성과로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일은 드물 것 같다.

  작년 6월 이곳 담양으로 전출와서 주거 환경개선 사업을 맡았는데 그때 이미 91년 농어촌 발전기금(추가분) 사업 희망농가가 파악되어 있었고 얼마 후 각 읍면 상담소장님들의 협조를 얻어 희망농가 재조사가 실시된 결과 당초보다 8여호가 더 희망해, 303호를 보고하여 259호의 사업량이 내려왔다.

  사실 303호의 희망농가를 보고하려 할때 우리 힘으로 하기에는 좀 벅찬 농가수라 여기고 염려되었지만 희망량 조사를 마친 후 많은 농가에서 “지금 바로 부엌개량을 시작해도 되느냐”는 문의전화가 쇄도하여 가능하면 희망농가 모두에게 혜택을 주기위해 조사한 숫자를 그대로 보고 하였다.

  그런데 막상 12월에 사업을 실시 하라는 공문이 와서 보니 우리가 보고한 희망량의 80%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우리는 다시 기존 희망농가중 본 사업 자금이 요긴하게 쓰여질 수 있고 파급 효과가 크리라 예상되는 농가를 우선적으로 선정하려고 전체 농가를 순회하며 심사표에 의해 심사를 실시 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전에 희망했던 303호중 180여호 만 개량을 희망하고 나머지 농가는 형편상 하기 어렵다는 책임 없는 말 한마디 뿐이었다.

  바쁜 나날중 희망 농가를 파악하기 위해 소요 되었던 시간도 상당히 많은데 우리에게 그 시간을 “헛수고”의 시간으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이 밉기도 하였으나, 사업량을 채우기 위한 80호의 부족 농가를 어떻게 확보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겨울철 농민교육을 하고있는 때라서 교육과 더불어 주거 환경개선 사업을 홍보한 결과 232농가를 확정 먼저 사업을 추진토록 하였다. 그때 까지 지도소에서 실시한 사업으로 주거환경개선을 실시한 농가가 800호가 넘고 행정에서의 보조사업도 240호가 되어 주거 환경개선의 시공요령이나 자재구입의 수준도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하지만 농가를 지도하면서 보니까 부엌개량, 욕실설치를 하는데 같은 돈을 들이고서도 아쉬운 점들이 있기에 추운 겨울철이었지만 232호를 2회로 나누어 사전교육을 실시 하였다.

  설계시공등의 교육과 5개 회사 제품의 보일러, 주방기구의 업자를 초청하여 그들로 하여금 제품의 가격 특성도 설명할 수 있도록 하여 농민들이 실제 구입할 때 품질 비교를 위해 여러곳으로 찾아다니는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교육 참석자들이 98% 자진 참여한 것을 보고 아직도 융자 사업을 많이 필요로 하고 120만원도 적은 돈이 아님을 알수 있었다.

  그후 이장단 회의를 통해 사업을 홍보한 결과 나머지 27농가를 선정하여 주지 환경개선을 할 수 있게 하였다.

  3월부터 사업이 끝난 6월까지 3차례에 걸쳐 순회 지도를 하였는데 교육 받은 내용 대로 대부분 사업이 진행되었지만 그중 행정에서 실시하는 보조사업 농가로 선정되어 융자사업 포기, 자녀들의 갑작스런 돈(사업비) 요구, 당사자나 가족 중의 병 또는 사고 등의 개인적인 사유로 사업을 포기하는 농가가 상당히 생겨나서 농가를 변경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생겼다.

  사업을 포기한 어떤 농가는 전화로, 지도소를 찾아와 세번씩이나 자기집을 개량할 수 있도록 부탁하더니 이제와서 아들이 돈이 필요하다고 사업을 포기하고, 또 한 농가는 융자금까지 수령해 놓고 바빠서 못하겠으니 융자금을 반납하겠다고 하여 그때부터 4개월에 걸쳐 부부를 설득하는 동안 여러 차례 마찰도 있었으나 시공 인부까지 알선하여 사업을 완료토록 하는등 많은 인내력이 필요 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농협 직원이 사업을 않겠다고 하면 반납하라 하면 될것을 왜 그렇게 고생을 하느냐”고 말을 하기도 하였으나 우리는 지도사업을 하고있는 생활지도사이기에 행정적으로 처리하면 편하고 좋겠지만 한 농가라도 혜택을 더 주기 위해 몸으로 마음으로 뛰어야 바람직 하겠다 생각되어 열심히 노력하였다. 하지만 때로는 '농민들과 언성을 높여 가면서 까지 했어야 했는가'를 생각하면 깊은 회의감 마저 들기도 하였다.

  작년 12월부터 92년 6월까지 7개월에 걸쳐 259호의 농가선정과 교육 3차례의 정기 순회지도, 포기 농가들의 대체 농가확보, 사업 미진 농가들의 추가방문 지도는 차량도 제대로 지원방지 못하는 형편으로 날마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였지만 좀더 많은 농가가 좋은 환경으로 개선되어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동안 힘들었던 모든 것이 사라져갔다.

  이 사업을 추진하는 동안 느낀 점으로는

  첫째, 평균 소요비용 400만원 정도 되는데 행정에서 지원하고 있는 100만원과 비교하면 거의 같은 액수의 융자금이어서 최소한 소요액의 50%인 200만원은 융자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었고,

  둘째, 농촌 부녀자의 의식수준이 너무 보수적이고 적극성이 없다는 것이다.

  주거 환경개선 희망량 조사때 해야겠다는 필요성도 주부 보다는 남편의 의견에 좌우되는 가정이 많고 대상농가 교육참석도 대부분 남편들이고, 농가별로 방문하여 설계나 자재 구입 등을 상의하여 보면 대부분 주부들의 대답은 “나는 몰라요 우리집 아저씨한테 물어봐야 해요”하는 걸 들어보면 생활수준이 높아진 만큼의 여성의식 전환이 되어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의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하여 문명 문화를 함께 누릴 수 있는 농촌생활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것이다.

  우리 농촌의 전농가가 주거 환경개선이 되어 편리하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되길 바라며 91년 주거 환경개선 사업(추가분) 추진사례를 간단하게 적어보았다.


쾌적하고 위생적으로 개량된 부엌 편리함과 아늑함을 준다.




 

 ▣ 생활개선 지도사례

 

 

 

새 시범마을을 접한 소감

 

 

 

고 영 란

구례군농촌지도소


♣ 생활지도사의 눈에 비친 것들···.


  제4차 신규 시범마을로 선정되어 발길이 잦아지게 된 산동면 탑동마을, 왠지 이름만 들어도 전원 냄새가 풍기는 산촌이 연상되는 마을이다.

  이곳은 구례읍에서 16km 거리에 위치하며 관내에선 상당히 먼거리라 할 수 있다.

  전 농가가 일반농사 및 특수작목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어서 다른 마을보다 소득이 높아 주재지도사의 지도 마을로서 이미 3년째 손길이 묻어 있는 곳으로 여러 사업들을 받아들인터라 마을에 들어섰을 때도 별로 낯설지가 않다. 하지만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으면서도 외적으로 볼땐 마을이나 주거 환경에 대한 관심은 저조하다.

  보조나 융자로 주거 환경개선을 한 농가는 38호 중 21호로 55%, 목욕실은 11호로 29%, 화장실이나 수세식은 볼 수 없었으며 삼조식으로 개량한 농가는 7농가 뿐이었다. 부엌환경을 보고 나서 다른 시범마을과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었는데 위생상태, 정돈상태 등이 좋지 않아 차라리 더욱 지저분해 보였다. 좀더 나은 환경개선과 생활개선 과제지도가 요망되는 곳이라 느꼈으며 앞으로 지속적 지도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마을로 기대가 크다.


♣ 시범마을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먼저 이 마을 지도 과제는 농촌 여성의 생활문화 공간을 조성하는 일에 착수했다. 우리 여성만의 공간을 마련해 보자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을 지도자들과 별 무리 없이 협의를 마치면서 작업은 시작되었고 마을 자체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알아서 잘 해 나갔기 때문에 훨씬 수월했다.

  지저분한 실내 분위기와 제대로 방에 앉지도 못할 정도로 먼지가 쌓여 있던 곳이 사라지고 보일러 시설과 도배 만 해도 새 방을 꾸며 놓은 듯 훌륭했다. 마을 부녀자들이 나와 도배하는데 협조함으로써 즐거운 가운데 일은 진행되었다.

  마을 자체에서 150만원의 자부담을 들여 회관 수리를 하고 지도소에서 사업비 140만원을 들여 씽크대, 진열장, 소파, 건강기구 5종을 지원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더군다나 소득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여 들기름, 참기름 생산을 위한 착유기와 볶음솥을 설치하여 효과를 더욱 크게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면서 마을 부녀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어느새 옛날의 모습을 잊어버린 듯 자기 안방 마냥 편하게 출입을 하였다.

  기쁨과 욕심이 충만한 기분으로 설치된 씽크대에서 서로 모여 음식을 마련하면서 폭소를 터트리기도 했다. 처음 앉아본 소파에 서로 즐거워했고 건강기구 중 혈압계의 인기가 가장 좋아 서로서로 앞다투어 자신의 혈압을 체크하는 모습들이 정겨웠다.

  차츰 여성들의 채취가 스며들고 감사의 마음들이 우리에게 전해져 왔을때 지도의 보람을 느꼈다고나 할까? 외부에 페인트칠을 하고 마지막으로 내걸린 '탑동 여성의 집'이라는 간판이 이젠 우리 여성들의 보금자리임을 과시하는듯 걸려 있었다.


♠ 기대와 다짐


  앞으로 갖가지 정신과 육체 수양의 장이 될 이곳, 다른 분야에 있어서의 생활을 접하고 좀더 나은 농촌 여성의 주역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되길 바라며 지도에 애쓰고자 한다.




▣ 생활개선 지도사례

 

 

 

 

‘여성의 집’을 지도하고

 

 

 

이 혜 경

무안군농촌지도소


  올 여름은 가뭄속에 단비를 기다리는 농민들의 바램 만큼이나 더웠던것 같다.

  거점 시범마을인 현경면에 “여성의 집”을 설치하기 위해 1달간 거의 매일 현지 출장과 전화에 매달렸다. 일이 우리 생각 대로 잘 되지 않아 짜증도 나고 몇번 대충하자는 생각도 했으나 현판식을 하는날 기뻐하는 동네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그동안 고생한 것이 씻은듯이 사라졌다.


♣ 마을선정


  제4차 생활개선 종합 시범마을 중 생활개선 시업에 의욕과 관심도가 높은 마을로 선정했는데 이 기준은 시범마을 기초 실태조사 때 실시한 평가표에 의해 현경면 오류5구 삽다리로 선정되었다.


♣ 마을민 사전협의회 개최


  92. 3. 31 마을주민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마을회관 정비 보완과 시설물 활용, 여성의 집 운영 및 관리방안, 마을 공동기금 활용방안 등 의논을 위해 생활개선회장ㆍ이장ㆍ새마을지도자 등 관리위원 3명을 구성하고 세부설계도를 작성하였다.


♣ 사업은 시작 되었으나


  주민들의 ‘여성의 집’에 대한 인식 부족에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오랫동안 비가 오지않아 모가 타들어가고 수박이 말라 버렸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농민들의 표정엔 누군가에게 모를 분노와 절망이 어려 있었다.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런 와중에 ‘여성의 집’을 설치한다고 출장다니는 우리가 곱게 보였을리 만무하다 출장나갈 때마다 오늘은 저집에서 물싸움을 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뭄이 들면 민심이 흉흉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열심히 도와 주시마 약속했던 이장ㆍ생활개선회장ㆍ새마을지도자들도 태도가 변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들 뿐인데 그들의 눈치를 조심조심 봐가며 논과 밭으로 찾아갔다.

  그러기를 며칠, 우리들의 염치 없는 태도(?)와 극성에 감동했음인지 바쁜중에도 우리 일을 도와주시기 시작했다.


- 하나하나 모습이 변모하기 시작 -

  그러나 마을대표 힘 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또 한차례 전체 마을 사람의 힘을 빌려 새벽5시에 “여성의 집”터를 닦았다. 모두 바빴으므로 이시간밖에 시간이 없었다.

  우선 불필요한 공간을 없애야 했다. 벽을 헐고 시멘트를 바르고 회관 앞 공터에 자갈을 놓아 기초공사를 거의 끝냈다. 그러나 아직도 할일이 많았다.

  재봉실, 건강관리실, 놀이방, 교육장, 조리실습실 등 140만원 보조만으로는 5개의 공간을 꾸미기에 너무 부족하여 회관보수, 도배, 장판에 이르기까지 마을 부녀회 공동기금으로 하고 우리는 140만원으로 재봉틀과 재단용품 셋트ㆍ정리함ㆍ전기다리미ㆍ싱크대ㆍ조리기구 셋트 등 '여성의 집' 내부를 꾸밀 물품을 사주었다.

  3일후, 이장ㆍ지도자ㆍ생활개선부 임원 등이 나서서 페인트를 칠하고 도배, 장판을 깔고 싱크대를 놓는 등 여러가지 일을 힘들다는 말씀 한마디 안하시고 “우리 팀을 만들어 부업을 해도 되겠는걸”하면서 농담에 밝은 웃음으로 임해주셨다.


- 더불어 마을 공동기금 조성을 위해 -

  지난 겨울 생활개선부가 주관이 되어 추위를 무릅쓰고 집집을 돌아다니며 혹은 논둑을 따라 폐비닐, 농약 빈병, 비료 포대를 모으기 시작했던 것이 점차 마을민의 호응을 얻어 ‘폐품 줍기운동’으로 크게 확산되어 폐비닐 11대, 농약 빈병 3,000개, 비료포대 2,000개가 모아져 100만원이 넘는 기금을 마련 올 5월 어버이날 경로잔치를 벌렸다.

  또한 올해에는 무엇을 할것인가 자문을 구해와 마을이 주산지인 점을 생각, 마늘의 결실을 튼튼하게 하려면 마늘 쫑을 뽑아야 되는데 버리기 아까워 장아찌를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한번 해보겠다 하여 부녀회원을 동원해 마늘쫑 뽑기를 시작, 큰 고무통으로 10통을 담았다.

  담는 방법을 소개해 보면,

  먼저 마늘종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없앴앤 후 쌀겨에 소금, 설탕을 넣어 버무린 다음 켜켜이 재워 둔다.

  비닐을 덮고 무거운 돌로 눌러 한달 정도 그늘에 두었다.

  판매는 장아찌를 진공 포장하거나 양념하여 용기포장해서 우선 도시에 있는 친척들에게 선물로 보내고 알뜰시장이나 바자회에 무료 시식회 등을 통해 소비자의 기호와 호응을 알아본 다음 반응이 좋으면 장아찌 공장을 세울 계획이다.

  이와같은 삽다리 주민들의 활동이 널리 알려져 군수님상을 받게 되었고 올해 군에서 보조를 받아 공병수집 창고를 설립하여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할 계획이다.


- 현판식을 하다 -

  7월 2일 마을 주민 그리고 지도자 몇분과 우리 생활지도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촐한 현판식을 거행하였다. 모두가 기쁨에 찬 모습이었다. 기념을 해야 한다며 음료수를 사고 생활개선부장댁에서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며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 앞으로 계획 -

  ‘여성의 집’은 마을민의 공동시설이자 교육장이므로 관리위원 3명이 관리하시기로 했다.


◈ 각 방의 구성과 활용◈

교  육  장 12평으로 기존에 있던 탁자와 의자를 이용 회의나 교육시 활용하게끔 했으며 문을 열었을 때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마을 현황판을 붙여 처음 마을에 오는 사람이라도 쉽게 마을에 대해 알 수 있게 함.

놀  이  방 2.5평으로 헌 타이어를 이용 탁자를 만들어 간단한 다과를 나눌 수 있게 했으며 방안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카페트를 깔고 부녀자 몇명과 홈패션 교육을 하여 커텐, 신발장덮게, 탁자덮게 등을 만들었다.

건강관리실 3평으로 헌 벽돌을 5개 쌓아 예쁜 벽지로 둘러싸고 쓰고 남은 합판을 잘라 이것도 벽지로 둘러싸서 장식장을 만들어 병조림, 저공해세제, 종이공예 등 생활개선 과제와 취미 교양 과제 등을 전시하였다.

  또한 “당신의 건강 점수는?” 란을 만들어 건강을 자주 체크하고 베드민턴, 줄넘기, 공 등을 비치 수구나 운동을 할 수 있으며 보건소지원으로 구급약품 상자를 이용 간단한 응급치료를 할 수 있게 하고 회관 앞에 철봉과 헌 타이어를 묻어 건강에 힘쓰도록 했다.

가사실습실 2.5평으로 싱크대를 설치하고 주방용품 셋트를 비치식 생활 교육이나 마을행사때 이용할 계획이다.

재  봉  실 3평으로 보조금으로 산 미싱 2대와 마을에 있는 4대, 칠판과 탁자, 서랍장을 배치하고 홈패션 교육으로 옷ㆍ화장지통ㆍ밥통덮게 등을 전시, 마을민들의 자질구레한 옷수선과 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바쁜가운데 더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힘을 합쳐 '여성의 집'을 만드는데 고생하시고 특히 애를 많이 써주신 이장, 생활개선회장, 회원들, 마을 지도자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여성의 집(재봉실)에 갖추어진 실습기구




 

 ▣ 생활개선 지도사례

 

 

 

도배기술교육을 하고나서

 

 

 

박 효 진

보성군농촌지도소


  지난해 생활 과학관을 설치하면서 군내의 도배기술 인력이 부족함을 느끼던 중에 부녀자들의 교육 요청과 부녀자들의 부업활동으로 유익하리라는 판단에 의해 ′92년 생활개선 특수사업으로 채택하였다.

  먼저 광주 도배 기술학원을 방문하여 교육방법이나 실습도구 실습장면 등을 견학한 후 생활 과학관의 예절실(다례원)을 실습실로 이용하기로 하였다. 다례원에 비치해 둔 물품들을 생활기술 실습실로 옮겨야 하고 곱게 다듬어 놓은 다례원이 엉망이 될걸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도 없진 않았으나 농촌 부녀자들을 위한 또다른 교육 실습장으로 이용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례원 정리를 하였다.

  부녀자 도배기술 훈련을 통해 기능갖기와 여가선용, 농촌 부녀자의 농외소득 개발 및 제공으로 농가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실시된 교육은 3월 3일부터 4월 9일까지 6주간 2기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매주 화ㆍ목요일(주 2회) 기당 6회 출석으로 1기 24명, 2기 27명이 참석하여 51명이 수료하였는데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출석하여 성의있는 참석율을 보여주었다.

  학생회장, 부회장, 총무 등을 선출해 자치활동을 하게 했는데 다른 교육보다 더 자율적이었으며 같은 동기라는 생각으로 모두들 친근함 속에 생활하고 교육에도 열성이었다. 교육시간은 오후 1시부터 시작해서 4시간 정도 계속되었는데 멀리서 오느라고 점심을 거르는 수강생들이 많아 스스로 간식을 준비하기도 했다.

  평소에 그냥 바르면 되지 무슨 교육이 필요할까 생각했는데 벽지 필요량 산출에서 부터 풀 쑤는 법, 종이재단, 풀 바르는 법, 무늬맞추기, 천정바르기 … 등을 배우고 나니 배울 것이 너무나 많고 도배하기가 쉽지 만은 않으면서도 배우고 나면 훨씬 빠르고도 바르게 도배를 할 수 있겠다며 배우기에 열중하였다.

  ′92 겨울 농민교육과 각종 과제 교육때 홍보 그리고 각 읍면 생활 개선부장들을 통해 교육 신청서를 접수하여 교육생을 선발하였으며 특히 능력개발을 위한 실습 위주의 반복교육으로 숙련도를 높이고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발판, 자, 풀통 등은 미리 만들어 준비를 하였으며 공구는 개인이 각자 준비하도록 했다. 1시간 강의와 3시간의 실기를 겸하였는데, 훨씬 효과적이었다.

  교육을 실시하기 전 설문지에 의한 면접조사를 한 결과 교육생의 연령분포는 61%가 30∼40세이고 41-50세가 35%로서 이 연령층은 육아 기간이 끝나고 여성 자신들 만의 시간의 여유가 있고 자아실현의 욕구가 높은 시기여서 교육 참여율도 높았다.

  연간 소득은 2천만원 이상이 20% 미만에 불과해 참석자의 과반수 이상이 농외소득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교육참여 동기는 기능을 익혀 부업으로 활용하겠다가 37%, 내집 가꾸는데 보탬 57%, 농한기 유휴시간 활용이 6%로 나타나 아직은 자기능력을 과소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시간 배정에 대해서는 82%가 좋았다고 평가했으며 기간에 대한 평가는 적당하다가 39%, 기간 및 회수 연장이 37%로 나타났다.

  교육을 마치고 난 후 본 교육에 대한 평가는 실기 위주의 교육으로 매우 유익했다가 90%를 차지했으며 전반적인 소감이 부업 기술교육으로 보람있는 교육이어서 더 많은 사람이 참여했으면 한다고 응답했고 취업알선을 건의하였다.

  본 지도소에서는 교육 수료자들에게 안정감과 자긍심을 부여하기 위해 수료증을 발급했으며 지업사 및 주거환경개선 농가와 연계, 부업을 알선토록 하고 있는데 가끔씩 도배기술 활용으로 농외소득을 높이고 있다는 소식으로 보람을 느끼고 있다.

  교육도중 견학을 온다는 말에 다례원을 원상복귀하고 숙직실을 실습실로 이용하기를 몇번 어려움도 많았지만 각 기마다 교육을 수료하는 날엔 새로 도배를 해놓고 한지장판을 깔고 자신들이 해 놓은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교육생들을 바라보면 그런 고생도 잊을 수가 있었다.

  차후 기능갖기 교육으로 희망하는 내용이 홈패션 및 양재로 53%의 높은 선호율을 보였는데 이에 따라 6. 30일부터 30명을 대상으로 2주간에 4회교육을 실시하였다. 식탁보, 이불, 침대커버, 커튼 등을 만들었는데 도배 기술교육에서 보였던 열성을 홈패션 과정에서도 볼 수 있었다.

  생활 과학관 설치 이후 각종 과제 교육은 물론 취미 부업 과제교육, 다례교실 운영 등이 실시되어 무척 바쁜 일정의 계속이지만 무엇보다도 군 실정에 맞고 부녀자들이 원하는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바람직한 자세라고 여기며 부녀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도배 기술교육이 한몫담당하였음에 의의있는 사업이라 생각된다.




▣ 생활개선 지도사례

 

 

 

 

지도사업! 이럴 때 보람을

 

 

 

박 근 숙

승주군농촌지도소


  먼지가 너무 많았다. 한 치 잎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숨쉬기 위한 호흡 조차도 참으리 만큼 농도짙은 먼지였다.

  92년도 업무분장으로 내게 새로이 주어진 업무가 “비닐하우스 건강휴게실”사업이다. 열악한 비닐하우스 내의 작업환경을 개선하여 농민의 건강을 유지하고 농가 소득증대에도 기여케 하기 위함이라는 사업목표를 되뇌이며 창문이 빠져버릴 듯 터털거리는 버스 뒷좌석에서 고개를 한없이 쭈뼛거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창문너머로 넘실거리는 하얀 물결이 있어 바삐 뛰어 내렸더니, 제법 넓게 펼쳐있는 둥근 지붕들이 혹여 신기루는 아닌지 염려스러울 만큼 우리 군에서는 보기 드문 하우스단지가 비닐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천하명당을 발견한 지관 마냥 기쁨을 추스리지 못하고 아무에게나 달려들어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농촌지소에 근무하는 생활지도사 ○○○입니다. 더위에 빠쁘신줄 알면서도 찾아뵌 것은 비닐하우스 재배농가를 대상으로 하는 좋은 사업이 있어서입니다.”로 시작해서 비닐하우스 재배를 하면서 느낀 불편한 점들을 물었다.

  “너무 덥고, 집에 다니기가 귀찮다”는 말에 귀에 날개돋힌 듯 솔깃했는데… 곧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본인 스스로도 휴게실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벼농사를 하면서, 비닐하우스 재배는 농한기에만 일시적으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동네 주민들의 논을 임차하여 농한기의 휴경지를 이용하는 형편인지라 하우스 포장 자체가 남의 땅이 태반이라는 것이다.

  “이 넓은 하우스에 진짜 땅주인이 없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의아해하는 내게 납득할 만한 설명이 뒤따랐다. 하우스 농사를 원치않는 옆논의 주인들에게 땅을 빌려 큰 하우스를 짓는 것이므로 벼농사를 짓기 전까지만 하우스단지로 남아있지 6월 말부터 7월 초가 되면 모두 논으로 변할 것이라 했다.

  언제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 아무도 없는 길을 걷자니 마음은 천근만근, 돌아와 복명할 것을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했다. 벌써 퇴근시간 15분 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갑갑증을 느끼며, 수화기를 들었는데, 과장님께서는 수고하였다며 그냥 들어가라셨다.

  노을이 엷게 물든 창밖을 보며 돌아오는 나의 마음에는 “「고정식하우스」가 없는 곳에서 어찌 휴게실을 지을 것인가?”싶어 사뭇 무언가에 짓눌리는 듯 숨이 차 왔다. 과징님 말씀 대로 벌쐰 망아지 마냥 날마다 쫓아다녀도 손에 쥐어지는건 공허함 뿐이었다.

  “이렇듯 어려운 때에 구세주라도 나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원예계를 찾았다. 평소 도움을 많이 주시던 원예 담당 선생님께서 하우스 농가 명단을 내게 알려주시는게 아닌가?

  소개 받은 명단을 들고 수화기를 들었으나, 통화는 한 군데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 그냥 찾아가는거다. 첫번째 농가는 만나질 못했다. 큰집에 가셨다나? 김빠진 맥주 마냥 땡볕속을 허우적거리며 두번째 농가를 찾았다. 어찌나 반겨주시는지 무슨 착각을 하신듯 싶었다.

  “교촌에서 봤습니다.”

  “뭘요?”

  “지도소에서 하는 일 말이요.”

  이미 건강 휴게실에 대해서 알고 계신 분이었다.

작년에 설치한 교촌의 건강 휴게실 2동을 보시고는 내심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사전 조사는 필요하기에 요모조모 따져보고 살펴보기도 했다. 배수구 정비는 잘된 편이었고, 집과의 거리도 제법 멀었고, 하우스 재배 농가가 비교적 많아 파급효과가 크리라 짐작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본인의 하려는 의욕이 높아보였다.

  성질 급한 그 분의 재촉으로 서둘러 계장님과 함께 현지 답사를 다시 하고서 우여곡절 끝에 선정이 되었음을 알려드렸다.

  3일후, 다시 의논하고자 찾아갔더니 벌써 집을 다 지어놓고는 손님 맞을 채비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집도 집 나름이지 비닐하우스 휴게실이 아닌 오두막집을 지어놓으면 어쩌자는 건지 계장님 뵐 면목이 없어져 버렸다. 참고 될만한 자료들을 복사해서 함께 의논 해보자고 갔는데, 벌써 다 되었다고 버티니, 다시 뜯어낼 일이 꿈만 같았다.

  재차 삼차 찾아가 설명을 하고, 안나오는 웃음을 지으며, 기름칠한 목소리로 성질을 꾹꾹 누르며, 함께 다시 시작하자고 설득하면서 지도사업의 어려움을 현기증나게 체험했다.

  각고의 실득 꼴에 고쳐 짓고 난 지금은 일하다 피곤해도 쉴 곳이 있어 좋다며, 화분까지 들여놓고는 손님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며 차를 끓여주시는 그분, 이마의 땀방울이 지도사업의 보람을 가슴깊이 체험하는데 차고도 넘칠 지경이었다.

  지도사업, 이럴 때 보람을!




 

 ▣ 생활개선 지도사례

 

 

 

농촌 환경오염 실태조사를 마치고

 

 

 

고 윤 자

여천군농촌지도소


  깨끗한 환경, 이것은 오늘에 이르러 우리 사회의 염원이자 지상과제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 환경오염은 날이 갈수록 심각성이 더해가고 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부터는 국민소득의 증대와 함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사회 전반적인 문제는 인간다운 생활의 추구, 문화적인 생활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민들의 의식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더욱 상승되었으며 과거 경제발전 우선 정책에 따라 물질 만능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고 그 결과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더불어 사는 기본적 소양인 “공동체 의식”이 점점 퇴보되면서 오늘날에는 도시나 농촌 할것 없이 가는 곳마다 금수강산은 쓰레기 강산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마저 들게 하는게 현실이다.

  이러한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나로서는 이번 농촌생활 환경오염 실태조사에 매우 의욕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사실 도시에서는 어느정도 인식 수준이 높아져 분리 수거의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으며 고층A.P.T 단지에서는 쓰레기통을 아예 폐쇄하고 있는 움직임까지도 일고 있다.

  정작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곳은 산이나 바다가 즐비하게 들어선 농어촌 지역으로 외부인들의 잦은 유입으로 인해 각종 쓰레기 뿐만 아니라 쓰레기 수거 제도가 사실상 정착되어 있지 않은 농촌지역이 매우 심각하다.

  고작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는 소각 또는 매립인데 이 방법도 한계성을 갖고 있다. 내가 조사를 맡았던 곳은 율촌면 가장리 난화마을로 여천시에서 약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멀리 해안가를 뒤로 한 축산농가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처음 마을 어귀는 깨끗해 보였지만 마을 산어귀나 골목길, 논두렁 곳곳에는 생활 쓰레기가 너절하게 버려져 있었다. 연탄쓰레기는 그저 곳곳에 쌓여 있거나 깨진 채 널려 있었고 마을 시냇물 사이로 고여있는 쓰레기들이 물이 맑아서 그대로 들어나 보였다.

  우리가 조사하기로 한 축산 농가 5호에게 조사 내용에 대해 말씀을 드렸다. 설문에 응하기 꺼려하는 농가는 쓰레기 심각성과 환경 오염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를 나눈 결과, 거절했던 마음들을 바꾸어 환경 오염에 대한 심각성을 매우 깊이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통 음식물 쓰레기로 인한 문제점은 농촌에서는 자체적으로 잘 해결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주로 소나 돼지 등 가축 사육에 먹이로 쓰고 있었다.

  농약 빈병이나 깡통, 플라스틱 등은 분리 수거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마당 한구석이나 골목 모퉁이에 버려 두었다. 폐비닐 또한 토양을 오염시키는 주범으로 그저 태워버리는 것에 그치고 있었으며 미리 수거되지 못한 비닐은 흙과 뒤섞여 파묻혀 버려진 상태에 있었다. 이런 상황은 비단 이 동네뿐 만이 아니였다. 스스로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기 보다는 그저 정부나 원망하고 있는 실정이 매우 안타까웠다.

  이런 마을들을 대상으로 우선 우리 생활지도사들이 앞장서서 간이 쓰레기 소각장 설치 요령을 마을 주민들에게 홍보하기로 마음 먹고 앰프 방송을 통해 마을분들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먼저 손쉽게 블럭 34장을 이용한 간이쓰레기 소각장 설치 요령을 비롯해 분리 수거를 할 수 있도록 비료 포대를 이용한 분리주머니를 만들어 활용하는 방법, 분리 수거한 농약 빈병이나 폐비닐은 자원 재생 공사와 연결 판매가 가능하도록 해 마을공동기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까지 일석 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지도를 했더니 마을주민들의 호응이 매우 높았으며 쓰레기 분리 수거에 너도나도 앞장서야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이젠 만성병 처럼 앓고 있는 쓰레기 문제에 대해 어느정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은 동네 사람들의 눈빛을 통해 한없이 보람을 느꼈다. 공공 기금은 공동 쓰레기 소각장 설치 비용으로 활용하시겠다는 말씀까지도 덧붙여 들었다.

  이번 농촌 생활 환경오염원 실태조사를 마치면서 나만의 편의를 추구하는 그릇된 생활 습관으로 생활 쓰레기와 주변 환경의 오염, 공해 등으로 말미암아 우리 개개인도 자신의 생명을 위험으로부터 노출되어 있고 스스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잘못을 저지르는 악순환만을 거듭하고 있다.

  나만의 편함을 도모하기만 했던 생활을 이번 조사를 계기로 살아 숨쉬는 금수강산을 만들고 보존하기 위해 내일도 생활지도사의 긍지로 이전의 어느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여 본다.




▣ 생활개선 지도사례

 

 

 

 

생활개선 시범마을 교육을 마치고

 

 

 

이 명 희

해남군농촌지도소


  92년을 알리는 새벽의 종소리를 들으며 나름대로 우리가 해야할 일들을 되새겨 본다. 생활개선 사업이란 훌륭한 여성 지도자를 길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막중한 책임이 어깨를 짓누른다.

  생활지도사로서 책임 완수를 성실히 해보고자 하는 의욕을 마음속 깊이 느끼며 생활개선 사업의 현장이며 실체가 된 생활개선 종합 시범마을 선정에 나섰다. 우선 희망하는 마을을 중심으로 출장, 마을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아직은 생소하게 느껴진 마을들을 메모한 수첩을 들고 운전기사에게 한번, 그 마을임직한 입구에서 한번 물어 마을입구에 접어들고 마을안길에 가서는 이집저집 기웃거려가며 이장님 집을 찾아갔다. “실례합니다. 계세요”를 연발하며 대문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집에 사림이 있으면 “계셨구나”하며 안심이 된다.

  “농촌지도소에서 나왔습니다”하는 한마디에 반가움을 표시하는 시골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보면서 실날같은 햇살 밖에 새어들지 않게 닫혀진 문틀이 확 열리면서 밝은 햇살이 가득 들어옴을 느낄 수 있었다.

  힘겨움 속에서도 소박한 시골 아줌마와 아저씨의 거짓없는 표정과 따뜻함으로 인해 저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솟구치지 않은가 싶다. 이런 마음으로 25개 마을을 실태조사 후 아쉬웁지만 13 마을만을 선정해야 하는 아픔이 있었다.

  13마을에서 실천농가 65호를 선정하고 교육을 실시했다. 여느 해나 마찬가지로 실천농가 교육이지만 새로이 시작된다는, 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이 아직 전달되지 않은 사람들이기에 더욱 열의가 생겼다. 이러한 우리의 열과 성이 끊기지 않고 마을민 모두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램에 5월 14일부터 순회 교육에 들어갔다.

  병조림 실습과 저공해 비누 만들기 실습을 해보이기 위해 무거운 짐을 들고 날마다 시범마을 회관 또는 부녀회장 댁으로 갔다. 가끔 교통편이 좋지 않아 우리가 약속시간 보다 늦으면 마을회관 담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부녀자들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바쁘지 않으세요”하는 말에 “바빠도 여기까지 와서 교육을 해주신디 나와야지라”하는 순박한 말 한마디에 정이 절로 통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농촌사람들이 무얼 모르기에 제자리 걸음만을 반복하고 있어 앞으로만 나아가는 사람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소외되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깝기도 했다.

  농가 생활개선 의식이 어느 단계의 수준 까지는 올라와 있으리라는 평소 생각이 생활개선 회원이 있는 3~4마을을 빼놓고는 교육을 다니면서 잘못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이러는가”하는 의문속에 생활지도사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는 것을 스스로 진정한 보람을 느끼면서 자부심을 가져보기도 했다.

  마음으로 진정한 보람을 느끼는 교육을 마치고 나서 “농촌 생활개선 사업은 할만한 것이다”라는 것을 새삼 되새겨 보며 앞으로 우리의 할 일들을 생각해 본다.




▣ 생활개선 지도사례

 

 

 

 

아직도 우리에겐 소중한 것

 

 

 

오 혜 림

장성군농촌지도소


  아직도 우리에겐 소중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이 고향의 흙을 지키며 살아가는 생활개선부원들의 손인 것이다. 오늘도 나는 이 소중함을 새삼 느끼며 장성읍 회원 한분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아침 일찍 전화 다이얼을 돌려 본다.

  신호음과 더불어 언제나 다정하게 받아 주시는 우리 회원님들! 2년전 어색함과 미숙함으로 어우러졌던 만남. 짙푸른 녹음 아래 유난히 매미 소리가 시원스레 들리던 날, 경험 많으신 계장님 따라 보따리장수 마냥 냄비집게 실습 재료를 한보따리 짊어지고 여기 저기 11개 읍면 생활개선 순회교육을 쫓아  다니면서 “안녕하세요 이번 7월 5일자로 발령받은 생활지도사 오혜림 입니다.” 서투른 인사하며 냄비집게 실습 요령을 설명하면서 유난히 떨리던 순간들…….

  그러나 지금은 어디 읍면을 가더라도 서로의 안부를 걱정해주며 환한 미소와 함께 헤어짐의 아쉬움을 다음의 만남으로 기약하며 출장왔던 길을 되돌아 오는 따뜻한 만남으로 변하였다.


♣ 생활개선부 육성


  1985년 경험 많으신 선배님들이 생활개선 구락부를 장성 만의 독특한 이름인 부녀 영농기술자회로 재창립을 하였다.

그 기반을 주축으로 현재 11개읍면에 372명이라는 인원이 활발하게 움직여 천오백만원의 기금을 가지고 있으며 생활개선 사업을 보급 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 생활개선부 활동 상황


  [푸짐한 온정으로 면내 화목한 분위기 조성]

  매년 북하면 생활개선부는 어버이달인 5월 경로잔치를 개최, 푸짐한 음식과 넉넉한 온정으로 회원 모두가 참석하여 우리 조상의 숭고한 정신인 경로 효친의 사상을 몸소 실현하고 있다.

  체육대회 및 노래자랑도 실시 소외감을 느끼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며 정성껏 마련한 음식으로 다과와 중식을 마련하고 장한 노인이라는 제목으로 시상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매년 초에는 인근 양로원을 방문 인적 드문 발걸음을 재촉 따스한 마음으로 떡국을 쑤어 드리며 털목도리도 선물하고 내년을 기약하며 거친 손으로 다정히 잡아주는 할머니의 손을 놓고 오는 마음이 정말 아펐다며 북하면 회장님은 앞으로도 계속 찾아  뵙겠다고 했다.

  또한 불우 이웃돕기 기금 조성을 하기 위해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들 무렵 관광객을 대상으로 2일간 백양사에서 도토리묵, 호박죽, 파전, 동동주를 비롯 김장아찌, 곶감 등 지방특산물을 판매해 수익금으로 부모님이 돌아 가시고 어렵게 살아가는 6명의 소년 소녀 가장에게 3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 푸근한 농심으로 삶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산하를 지키는 생활개선부원의 손]

  서삼면 생활개선부는 생활개선 교육을 통해 합성세제의 유해성을 깨닫고 저공해 비누 만들기 실습을 계기로 점점 오염되어 가고 있는 내 고장의 물을 우리가 지키자는 결의를 하였다.

  그 결의 아래 회장을 주축으로 5개조로 편성된 회원들이 바쁜 농사일 틈틈이 상담소장님 협조 아래 폐식용유를 수거하고 4월 22일과 5월20일 2회에 걸쳐 2천개의 비누를 만들었다.

  가성소다와 물이 반응하는 순간 발생하는 유독가스와 가성소다가 피부에 닿으면 따가운 아픔을 감수해야 했지만 회원들은 정성스레 저공해 비누를 제작 350g 1장당 200원에 판매 하였는데 사용해본 주민들이 시중 판매 비누보다 훨씬 우수한 세척력을 인정하여 두번째 보급할 때는 만든지 하루 만에 모두 동이 나는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이렇게 2천개의 비누 보급으로 3십만원의 기금도 조성해 힘을 얻은 생활개선부원들은 앞으로도 계속 폐식용유를 수거 비누를 보존, 환경도 보급하고 기금도 마련할 계획이다.


  [생활개선 교육의 날은 알찬 하루로]

  “아침상을 치우기가 바쁘게 늦지 않으려고 부랴부랴 왔어요” 하며 읍면 순회 교육 때 만나는 모범 회원님들, 현재 장성은 생활개선부 회원들에게 대표적으로 11개 읍면 순회 교육과 집합교육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회원들에게 우리들은 한가지라도 더 배움의 기회를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91년 군단위 3/4분기 생활개선 교육을 백양사에서 80명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레크댄스, 글짓기, 줄다리기, 보물찾기 등 다채로운 내용으로 성대하게 치루었다.

  우리들은 교육 준비를 하면서도 과연 들에서 일만 하는 회원들이 얼마나 글을 쓸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며 시상품을 정성스레 포장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각이 착오였다는걸 일깨워 주신 회원님들. 너무나 감동적인 글들이 많아서 눈시울이 뜨거웠던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줄다리기 경기때는 너무 열중하여 삼베 모시옷이 찢어진 줄도 모르고 열심히 마을을 위해 뛰시던 회원님들! 그날이 엊그제 같은데 …….

  우리들은 또다시 92년 7월 24일 장성호에서 생활개선부 회원 200명을 대상으로 체육행사를 실시 하였다. 삼복 더위 아래 우리 회원들은 “이열치열”이라고 땀으로 더위를 식히며 열심히 뛰고 즐거워하며 마음의 갈증을 촉촉히 적시는 즐거운 교육이 되었다.

  또한 부녀자 기능갖기 도배 기술 교육을 7. 27∼8. 28까지 2회 40명을 대상으로 실시, 이 교육을 발판으로 농가소득 향상에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 앞으로의 계획


  ‘항상 가까이에 있는 생활개선계’

  우리 회원들과 마음으로 통하는 글귀이다. 이 글귀처럼 우리들은 부단히 정진과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배울 데 별로 없고 새 문물 접해 볼 기회 별로 없는 회원들에게 도시 여성 못지 않는 문화적 욕구를 채울 수 있도록 취미, 교양, 지식 등 모든 면에서 우리 힘 다하는데 까지 익히게 해 우리 생활개선부원들의 손으로 이 고장을 지키게 할 것이다.




▣ 생활개선 지도사례

 

 

 

 

마르지 않는 꿈

 

 

 

양 순 미

나주군농촌지도소


  “길을 다하여 먼날, 우리 서로 같이 있지 못해도 그 눈 나를 찾으면 그속에 내가 있으리. 목숨 다하여 먼날, 우리 서로 같이 있지 못해도 그 생각 나를 찾으면 그속에 내가 있으리”

  시골의 여름밤 하늘은 너무도 맑아, 금방이라도 머리위로 쏟아져 내릴것만 같은 별들을 바라보노라면 누구나 시인이 될것 같은 생각에 어슴프레이 뇌리에 스쳐가는 기억들을 더듬으며 시를 읊조려 본다.

  내가 광양에 있을 때의 일이다. 생활지도사라는 배를 타고 여생의 항해를 시작한지 어느덧 2년이 지났다. “인생은 무엇보다도 그 인간이 실천해서 쌓아올린 업적이 모든것을 말해준다”는 어느 시인의 글귀를 생각하며 생활지도사로서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헤아려 본다.


♣ 하눌타리를 발간하며……


  하눌타리는 초여름이 되면 우리의 산야에 하얀 꽂을 피우는 박과 식물이다.

  한여름 작열하는 뙤약볕 아래에서도 돌담위에 살며시 얼굴을 내밀며 정겨운 몸짓으로 반겨주는 소박한 하얀꽃. 오랫동안 우리네들을 “한울타리”로 엮어온 넉넉한 꽃이다. 이런 의미에서 광양군 생활개선 회보를 “하눌타리”로 명명하게 된것이다.

  하눌타리는 그동안 총 5회 2,500부가 발간되었다. 생활기술과 생활경영 분야, 우리 문화를 더듬어 보는 봉산탈춤, 사랑방좌담(우화, 수필, 고사성어 등을 통해 풀어보는 세상이야기), 생활과 멋(독자란, 시), 생활정보 등 8면으로 구성하였다.

  하눌타리는 우리 농촌의 생활문화와 정신문화를 개도시켜 나가겠다는 취지 아래 참신성, 최신정보, 시기성 등을 고려하여 편집되어지고 회보 발간을 위해 언제부터인가 자료의 가치가 있으면 컷, 글귀, 동화, 사진 등을 메모하고 오려내어 스크랩북하는 버릇이 생기게 됐다.

  발간된 회보는 생활개선부원과 실천농가를 대상으로 우편으로 우송해 회원들로 하여금 받아보는 기쁨을 더하게 한다.

  출장길에 마주치는 생활개선부원들, 유관기관 관계자들로부터 “생활개선부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는 얘기와 “생활개선 사업에 대해 재인식하는 계기가 됐다”는 말을 듣게 될 때마다 추운 겨울밤 텅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손을 호호 불며 편집하던 기억, 은연중에 내 인격이 투영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 등……, 그 모든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기도 한다.

  들을 지나며 무심히 마주치는 들꽃 처럼 삼삼히 살고픈 소망들이 ……, 속으로 속으로 깊이 아름다움을 가꾸며 살고픈 소박한 꿈들이, 무심코 책갈피를 뒤적일 때 발견하게 되는 오래전에 끼워 놓았던 코스모스 꽃잎들 처럼 퇴색한 빛으로 다가설 때마다, 하눌타리는 마르지 않는 샘물 처럼 내소망, 내 꿈들을 소생시켜 준다.


♣ 생활문화공간을 조성하며…….


생활문화공간을 조성했던 92년 7월은 “작열하는 태양” 그 자체를 실감케 하는 날들이었다.

  7개 읍면으로 구성된 광양군은 제4차 생활개선 종합시범마을로 7개소를 지도하고 있었다.

  짧은 지도 경험이었지만 생활개선 시범마을 육성을 위한 예산확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계장님께 수차례 건의하여 이를 상정, 추경에 540만원을 재료비로 확보하게 되었다.

  오랜 고민끝에 이 예산을 생활문화 공간 조성을 위한 사업비로 활용키로 결정했다. 무엇보다도 91년도에 시범마을 육성책으로 세워진 군비 30만원을 옥곡 삼존에 마을공동 휴식공간 조성비로 활용했던 여파가 컸으리라 짐작된다.

  추진 전에 마을을 순회 방문하여 마을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유치할 수 있는 사업내용을 결정하고, 1/50~1/100 축도 평면도를 그려 면적과 전체적인 분위기를 고려해 물품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렇게 해서 7개 마을에 대한 사업내용, 방향, 규모를 결정하고 땡볕이 내리쬐는 7월 초순에 이를 착수하게 된것이다.

  그중 봉강신촌 마을은 마을 입구에 200평 규모의 아름드리 정자나무 동산이 있는데, 잡초와 각종 폐기물로 뒤덮혀진 채 버려져 있는 공간이었다.

  여기에 도 시범사업을 유치해 인조목 의자와 탁자, 평행봉ㆍ철봉ㆍ요통방지기구 등의 체력 단련기구를 설치하고, 메리골드ㆍ페추니아ㆍ칸나ㆍ사루비아ㆍ맨드라미 등 200여본의 화초를 5평 규모로 3곳에 나누어 심어 마을단위 소공원으로 조성했다.

  후에 이곳에 원장님과 청장님이 내방해 주시는 영광을 갖기도 했다. 나머지 6개 마을은 확보한 군비로, 4개 마을은 인조목 의자와 탁자를 설치한 마을 공동 휴식공간을, 한 마을은 인조목 의자와 탁자, 평행봉ㆍ철봉 등의 체력단련 기구를 겸비한 마을공동 휴식공간을 조성했다.

  마을회관이 좋은 광양읍 현월마을은 회관 내부에 조리실습실과, 다도ㆍ서예ㆍ독서ㆍ홈패션 실습을 겸한 다목적 생활문화실을 조성해 마을 여성들의 전용 공간으로 활용케 했다.

  마을휴식공간과 농촌여성의 집 조성의 추진 중에 논바닥이 갈라지고, 모를 못심는 논이 부지기수 였지만 ‘우리마을에 이런 좋은 시설을 해줘서 참말로 고맙소이’ 하면서 흙ㆍ자갈을 나르던 마을 아낙네들을 바라보며, 때로는 온통 자갈 투성이인 돌밭을 곡괭이로 직접 파헤쳐 보면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개도 안걸린다는 여름철 몸살 감기에 걸려 며칠 푹 쉬어야 될 몸을 이끌고 현장에 나가 작업을 추진하면서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자리에 있게 하는 가를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금 추진하는 이 일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바라봤을 때 자연경관을 헤치고 환경을 파괴하는 일은 아닐런지 ….

  며칠동안 잠자리를 설치며 고민도 해 보았지만, 쉼터가 없어서 악취가 풍기는 축사 담벼락 밑에 쭈그리고 앉아 휴식을 취하던 부녀자ㆍ할머니들이 이제는 휴식공간에 앉아 오손도손 정담을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며, 소외되고 잊혀져 가는 이땅에 미력하나마 문화적 혜택을 부여할 수 있다면……. 그래서 삶의 활력소가 되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일이 아니냐는 당위성을 부여해본다.

  이곳 나주로 오게 되면서 또 새로운 생활지도사로 살아갈 각오와 무슨 일이든지 그속에 내모습을 담고,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 생활개선 지도사례

 

 

 

 

“배나무골 아낙네”를 발간하고…

 

 

 

이 순 희

나주군농촌지도소


  우리 인간의 특징을 논하는 자리면 의례 인간 만이 갖는 위대함 즉, 사고력, 사회성, 직립보행, 도구사용, 언어소유, 불의 사용, 놀이본능 등이 나열되기도 한다.

  물론 모두가 인간 만이 갖는 참으로 고귀한 특징들이지만, 그 중 무엇보다 인간을 위대한 존재이게 한 것은 사고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표출해 내는데 있다고 본다.

  하루하루의 모든 일을 현명하게 반성하고 현실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장래를 미리 그려보고 그를 향해 맹진해가는 꿈을 가진다는 것은 동물과는 다른 인간 만의 위대성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취지 아래, 시ㆍ수필ㆍ생활개선사례, 부녀자 생활수기 등 지면을 통한 만남의 기회를 부여하고, 풍요로운 복지농촌 건설에 앞장서온 노고에 보답하고, 보다 나은 생활개선 사업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활개선부원과 기타 부녀자를 중심으로 원고를 수집하여 생활개선 문예집인 “배나무골 아낙네”를 발간하였다.

  주로 상담소장님과 면 회장님의 추천을 받아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통화로 지난 3월 부터 원고 수집에 들어갔다. 그 당시는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탓이라 부탁하는 분마다 긍정정인 대답을 해주셨던 분들이 시간이 지날 수록 바쁘다거나 소질이 없다는 핑계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실망하지 않았다. 농사일은 느긋함을 요구한다. 씨를 뿌리고 나면 싹이 터야하고, 또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수확을 하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가을이 아무리 기다려져도 뜨거운 여름을 지내고, 소나기를 맞으며 인고하고 넉넉히 기다려야 하듯이.

  그래서, 낮에 연락이 닿지 않은 곳은 엽서로 혹은 전화통화를 하여 원고 부탁을 하고, 다음날 출장 약속을 하여 직접 찾아뵙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매일 시외통화를 하느라 식구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는사이, 원고가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원고 수집 과정중에, 조금 역설적인 경우를 들자면, 생활개선회원에게 출장 및 전화 면담으로 원고 부탁을 한 뒤, 완료되었다는 응답에 원고를 가지러 갔는데, 완료는 커녕 시작도 안한 것이다. 이유를 물어본 즉, 농사일이 너무 바빠 손댈 틈이 없었는데, 나의 끈질긴 열성 때문에 차마 못했다는 소리가 안 나왔다는 것이다.

  그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물론, 농사일에 시달리느라 글을 쓸만한 시간적 여유는 물론 이런 기회가 좀처럼 없었기에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대강 짐작했지만 회원들에게 아주 무거운 짐으로 여겨졌다면 이번 취지와는 어긋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소나마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기회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사람들도 꽤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3개월 동안의 원고 수집 기간 중에 40여편 이상의 많은 원고가 수집되었고, 몇편은 약간의 수정과, 인쇄 후 여러차례의 교정 과정을 거쳐, 100페이지라는 한정된 지면 관계상 모두 수록하지 못하고 다음 기회에 꼭 실어드리기로 약속했다.

  처음 발간된 이 소중한 책들은 원고 제출자와 생활개선부원, 유관기관에 배부하였다. 다소 부족한듯 해 다음 기회에는 더 많이 발간하여 생활개선부원 전원에게 읽히고 싶다.

  원고를 통해, 생각보다 야무지게 자신의 꿈을 말하는 이가 적지 않음을 알았고, 문장 솜씨의 자연스러움과 주체의식이 확실해 자못 대견스럽고 흐뭇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의 인생은 누구에게나 유일무이한 단 한번의 소중한 삶이다. 이 소중한 삶을 그 어느 한 순간이라도 그저 되는 대로 남의 일처럼 방관하고 무계획적으로 소홀히 다뤄서야 되겠는가? 우리가 세상에 나와 가장 확실하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그 자체라는 것을 이 책을 읽음으로써 다시 한번 깨달아본다.



  나주군 농촌지도소에서는 시, 수필, 생활개선사례, 부녀자 생활수기 등 지면을 통한 만남의 기회를 부여하고, 풍요로운 복지농촌건설에 앞장서온 노고에 보답하고, 보다 나은 생활개선사업이 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생활개선부원과 기타 부녀자를 중심으로 원고를 수집하여 생활개선문예집 “배나무골 아낙네”를 발간하였다.

  석달간의 원고수집기간을 통해 6월 30일에 100부를 발간하여 원고제출자, 생활개선부원, 유관기관 등에 배부하였다.

  뒷면에는 생활개선사업소개를 통해서 생활개선사업에 대해 한층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고. 이 책은 바쁜 농사일, 가사생활중에서도 잠깐 여유를 갖는 신선감을 보여주고 있다.






 

 ▣ 생활개선 지도사례

 

 

 

농촌여성 일감갖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김 현 숙

완도군 신지면 양지


  우리 완도군 신지면은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 쯤은 들어봤을 고장이다.

  면소재지에서 버스로 10여분 소요되는 우리고장 양지마을은 요즘, 유자 재배면적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

  전에는 소량씩 생산한 유자로 유자차를 담궈 집에서 소비하거나 가까운 친척집에 나눠주는 정도로 그쳤던 것이, 유자 생산량의 증대에 발맞춰 군지도소 생활개선계의 도움을 받아, 농촌여성 일감갖기 사업으로 유자차 가공 상품화 사업을 시작하여 소득을 올릴 계획에 있다.

  유자는 과실 자체로도 고가의 식품이지만 차로 가공할 경우, 유자의 출하가 끝날 시기에 맞추어 판매할 수 있는 저장성이 있어 훨씬 더 유리한 가격을 받을 수 있다. 뿐만아니라, 맛과 향이 좋으며 비타민의 함량이 높아 사람들로 부터 건강식품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러나 농촌여성 일감갖기 사업을 실행하게 되기까지는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바다를 접하고 있는 섬지역이기 때문에 사시사철 바쁘다. 더구나 시간이 있을 때 마다 인근의 미역공장에 나가서 일을 해주고 일당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서 유휴 노동력을 이용한 농촌여성 일감갖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바쁜 실정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유자는 10월부터 수확기에 접어든다.

 어촌에서 드물게 짬이 나는 시기가 바로, 농사일 끝나고 바닷일 시작되기 전인 이 시기이므로 아주 적합한 사업이라 여겨진다.

  처음에는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판로가 막히면 어쩌나’하는 두려움 때문에 선뜻 마음이 끌리지 않았으나 다른 지역의 성공사례를 보고 또 생활지도사 선생님의 사업계획과 설명을 듣고나니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래서 마을 부녀자들이 함께 모여 기자재 구입, 판로개척, 경영관리 등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해 보았다. 처음에 ‘그 일 없어도 마냥 바쁜데 어떻게 하느냐, 일이 잘못되면 책임지기도 힘들고 하니 아예 시작을 말자’며 주저하던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여간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 사업에 대한 전망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차근차근 설명해 주고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러자 다른 부녀자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왕 시작한 일이니 열심히 해보자. 판로에도 직접 나서보겠다’며 입을 모아 말하게 까지 되었다. 우리 농촌에 사는 대부분의 주부들은 가정의 경제권을 갖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요할 때 마다 시부모님이나 남편에게서 조금씩 얻어쓰고 있다. 실제로는 집안일, 농사일, 바닷일까지 남자보나 더 많은 일을 해내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불공평한 일이다. 주부에게도 경제력이 어느정도는 있어야 일에 대한 의욕도 생기고 보람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유자차 사업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부녀자들끼리 일을 계획하고 착수해서 그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가슴 뿌듯하게 느껴진다.

  올 가을 부터 시작할 유자차 가공 판매 사업을 떠올리며 오늘도 더 풍요로운 내일을 위해 바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 부녀자 생활수기

 

 

 

병아리의 합창

 

 

 

최 지 태

여수시 오천동


  여수시내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가면 쥐취포로 유명한 우리동네가 나온다.

  충청도 산골에서 이곳으로 시집온지도 벌써 25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처음 시집왔을 때 허물어질 것 같은 초가집에 어린 동생들과 홀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정이 산골이기는 하지만 농삿일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보릿쌀을 찧는데 애를 먹었다.

  어떤 때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봇짐을 싼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것이 “나의 길이다” 생각하고 마음을 굳게먹고 그 많은 농사일과 소도 키우며 온갖 힘든 일을 다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농한기 때는 우리 동네에 들어선 쥐취포 가공공장에서 적지않은 수입을 올렸는데 3년째 공장이 가동되질 않고 있어 무슨 소일거리가 없는가 하고 찾고 있는데 마침 지도소에서 실시하고 있는 농촌 여성 소득활동사업을 우리 동네에 유치하여 참기름 착유기 등 필요한 기구를 지원받아 맛있고 고소한 참기름을 직접 짜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또한 금년에도 농가에서 손쉽게 실천해서 부업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영양식품 생산으로 이 농가에 토종닭 1,200수를 지원받았다.

  두꺼운 껍질을 깨고 갓 태어난 검은 병아리가 종축장에서 부터 먼 길을 달려 오느라 피곤한지 차에서 내려 놓자마자 “삐약 삐약” 야단 들이다.

  병아리를 갓난아기 모양 애지중지 키우는 재미도 그만이다. 어쩌다 한마리라도 죽으면 어찌나 서운한지 모른다.

  모이를 줄려고 문을 열면 “아이 배고파” “삐약 삐약”하며 밖으로 마구 나올려고 한다.

  이젠 정성스럽게 키운 병아리가 어미닭이 되어 검은 모래로 유명한 만성리 해수욕장이 있는 옆동네와 승주, 순천 등지의 산장에 납품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귀찮다고 기르지 않을려고 하던 사람들이 이젠 부러운가 보다. 처음 마련한 통장에 돈이 쌓인다. 내 몸에 힘이 생기듯 우리 마을에도 그렇게 부자되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 부녀자 생활수기

 

 

 

어느 시골아낙의 소박한 소망

 

 

 

윤 옥 순

담양군 금성면 대곡


  우리 마을은 담양읍에서 북쪽으로 약 15km 되는 곳에 위치해 있고 하루 5회 운행되고 있는 군내 버스를 약 10분 정도 타고 와 버스에서 내려 시원하게 뚫린 시멘트 길을 따라 약 5분 정도 걸어 오다보면 아담하고 깨끗한 인상을 주는 인정 넘치는 마을이 그림 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50여 가구에 100여명으로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남자보다는 여자가, 젊은 사람보다는 나이 많은 노인분들이 더 많이 살고 있다.

  주요 농업 형태는 시설 원예로서 메론과 딸기 재배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을민 모두가 유달리 근면 성실한 자세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마을에 비해 평균 소득액이 좀 더 높은 편이다.

  내가 금성면 대실마을과 인연을 맺은지도 어느덧 45년째가 되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15살 되던해 금성면 오평이라는 낯선 마을로 이사와 살고 있었는데 담양의 기후 조건이나 지역 조건이 이곳 담양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고 결국 이곳에 정착해서 살게 되었다.

  17살 되던 해 이웃 어른의 중매로 당시 대곡리에 살고 있던 지금의 남편과 단 한번 선을 보고 결혼을 하게 되었고 신혼살림도 남편을 따라 대곡리  대실마을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처녀시절 힘들고 어려운 일 없이 살다가 직접 내손으로 농사 짓고 발을 메는 일들이 나에게는 퍽이나 벅차고 힘든 일이었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었기에 몸은 피곤해도 마음 만은 힘들다는 생각 없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시골 생활에 동화되어 갔다.

  본래 성격은 내성적이었지만 직접 농사 일을 하다보니 힘든 일에도 무슨 일이나 앞장서서 술선 수범하게 되고 그런 내 모습이 마을 분들에게 신뢰감을 준것 같다.

  마을을 위해 열심히 일해 주기를 바라는 마을민들의 한결같은 권유로 1962년부터 마을 부녀회장을 맡아 지금까지 봉사해오고 있다. 기존 부녀회장으로 부터 마을 부녀회 공동 기금 67만원을 인계 받았지만 너무 적은 기금이어서 우선 부녀회 공동 기금 마련에 목적을 두었다.

  부녀회원들 만의 농외 소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곳저곳 품앗이 할 곳도 알아 보고 근처 공장등지를 찾아다니며, 우리 마을에 일감을 맡겨주시면 열심히 해드리겠다고 사정해가며 부탁해온 결과 지금은 콘크리트못 포장 작업으로 우리 회원 모두 안정적인 부업을 갖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집 마당을 공동 작업장소로 내놓아 매일 함께 모여 작업을 하고 있는데 하루 서너시간 작업으로 농가당 평균 8천원부터 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함께 모여 일하다 보니 서로의 가정 생활이라든가 어려운 일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 마을민 단합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군 행사때 읍면대항 체육대회에서나 부녀회 요리 발표회 때도 꼭 입상을 하면서 두드러지게 단합된 면모를 보여 누구든 우리 마음을 단합이 가장 잘 되고 활동도 가장 열심히 하고 있는 마을로 인정해주고 있어서 이 점이 내게는 가장 자랑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지도소에서도 이런 우리 마을을 제8차 주재지역, 생활개선 종합시범마을로 선정해 주어 우리마을이 농촌지도소와 더욱 가까운 인연을 맺게 되었다.

  특히 지도소에서 죽순염장시범마을을 선정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생활지도사 선생님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지도소를 찾아가, 우리 마을이 마을민 단합이 잘 되고 대밭이 많으니 우리 마을을 지원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다음 날 마을을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

  다음날 지도소 생활지도사 선생님 두 분이 직접 우리 마을을 찾아주셨고 결국 우리 마을이 ′92 농촌 여성 소득활동 시범마을로 선정되어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15농가를 중심으로 추진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공동 작업 장소가 마땅치 않았지만 마침 마을의 노인회관과 보일러실이 여름철이어서 사용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공간을 활용, 작업장으로 만들어 가스버너를 설치하고 죽순 염장 저장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 이 사업에 참여할 생활개선부원들 모두 열의에 차 새로운 각오로 출발할 수 있었다.

  죽순이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하는 5월 중순이 되자 농가 마다 대밭에 나가 죽순 생장 상태를 살폈고 생죽순 채취 시기가 되자 거의 매일 대밭에 나가 죽순을 절단해와 열심히 저장했다. 각각 자기통에 이름을 써붙이고 매일 적은 양이지만 조금씩 저장해 두었어도 한발 피해로 인해 양은 극히 적었다.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 걱정이 되어 매일 잠을 설쳐가며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날마다 출장나와 함께 고생하는 생활지도사 선생님들께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괜히 이 사업을 우리 마을에 가져왔나 싶은 후회도 들었다.

  참여농가에서도 만나는 사람 마다 비가 오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계획량에 도달하기 위해 이웃 마을을 찾아가서 생죽순을 kg당 750원씩 사다가 저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비가 온 후에도 죽순은 많이 올라오지 않았다. 한개라도 더 저장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7월 22일 저장한 것을 마지막으로 총 저장량은 다행히 당초 계획량 1,200kg을 넘어 1,280kg이 되었고 농가별 실제 저장량을 잴 때는 손에서 땀이 나기도 했다.

  이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누구나 판로를 걱정하기도 했는데 다행히도 우리가 저장해 놓은 염장죽순 만큼은 금성농협에서 전량 책임지고 판매해 주기로 했다는 지도소 선생님의 말을 듣고 마음 한 구석 자리잡고 있던 판로 걱정은 깨끗이 씻어버릴 수가 있었다.

  이제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상품포장지 제작문제와 어떻게 하면 좀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는가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문제가 그다지 크게 걱정되지 않는 것은, 지도소선생님들과 농협에서 우리를 위해 열심히 애써주시고 특히 우리 마을 생활개선부원들이 한결같이 내가 앞장섰던 일을 믿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업을 성공리에 마치고 우리 대곡리 대실마을이 여기저기 신문지상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조용히 미소를 띄워본다.




 

 ◐ 부녀자 생활수기

 

 

 

하우스에서 날이 새고 저무는 삶일지라도!

 

 

 

신 해 숙

곡성군 곡성읍 장선


  우리 마을은 곡성군청에서 북쪽으로 약 3km 지점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미맥을 위주로 소득이 낮은 편이며, 겨우 한우를 호당 한 두마리씩 사육하면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가난한 마을에도 소득을 올려보려고 보리농사 대신 82년도에 4농가에서 단옥수수 재배를 하였지만 처음에는 생산비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 순수익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래도 보리농사 수익 보다는 괜찮은 편이어서 주위분들께 권해 보았는데 모두 믿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포전-상인에게 파는 것-매매를 하면 하우스 한 동에 50만원을 준다기에 그렇게 하지 않고 부산의 위탁상인에게 위탁매매하여 75만원을 받았었다.

  강건너 불구경하던 사람들 중에 아저씨 한분이 나의 말을 믿고 옥수수 재배를 시작했는데, 그 결과 우리 부부의 말이 사실인 것을 알고는 정말 옥수수가 해볼만한 직물로 증명이 되어 많은 분들이 하우스 재배에 참여하고 있다.

  지금은 딸기가 90동, 감자 20동, 옥수수 150여동으로 늘어나서 일손이 부족하여 다른 동네에서 구해야 할 처지다.

  주위분들께 권하고 싶은 것은 많은 면적이 재배되면 상인이 생산자를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운송문제도 한결 수월해지므로 농가를 위해서도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재배단지화 시키면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가가 하우스를 오랫동안 하였어도 워낙 가난한 살림이라서 사실 돈은 벌지 못했어도 남편이 7년 동안 작목반장을 하면서 많은 면적이 재배되도록 애쓴 노력이 공적으로 인정되어 91년도 10월에 “이달의 새농민”이라는 과분한 상을 받았다. 부상으로 일본연수를 가게 되어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후꾸오까 공항에 내려선 인상은 거리가 너무도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하루밤 민박했던 농가의 검소하고 깨끗함, 질서 정연함을 보고 우리 국민성은 언제쯤이나 이렇게 될까 생각했다. 수상자 14부부, 국내인솔자 두분, 현지 가이드 한분, 농협 중앙회 일본사무소 소장님 한분 등 32명이 5박6일 동안 일본의 남부지방 후꾸오까, 규쥬, 뱃부 등 관광도 하고, 농장 및 일본의 농가와 경매시장 등을 견학하였다.

  모든 농산물은 포장이 되어서 생산지가 분명하게 표시돼 있을 뿐 아니라 소비자가 직접 주방으로 가지고 가서 씻으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출하되고 있었다. 또한 속내용물과 겉으로 보이는 내용물도 똑같은 제품으로 소비자가 믿을 수 있게 만들었다.

  일본의 시모노 농협에 들렀을 때 조합원 400명에 직원이 100명이나 되는 중소 농협으로 생산한 농산물은 모두 가공하여 부가가치를 높이고 소비자와 직접 연결판매를 하고 있었다.

  그곳의 조합장님은 45년이나 재직하면서 농민을 위한 농협으로 만들려고 많은 애를 쓰고 있었다. 우수 농산물을 생산하려면 퇴비를 많이 넣어야 된다고 하시면서 퇴비 생산공장을 제일 먼저 설립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지리적 특성, 국민성이 다르지만 식생활에는 유사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 농산물을 일본에 수술할 날도 머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경매시장에서 본 생산자는 회갑을 넘긴 사람이 많아 그곳 채소과장은 한국의 농민층이 아직은 젊다고 부러워하였다. 덧붙여 머지않아 한국에서 농산물을 가져다 먹을 거라는 말을 듣고 그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일본은 소과(小果) 선호도가 높다며 희망을 갖고 농사지어서 일본에 수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농업에 관계되시는 분은 역시 순수하다고 느꼈다.

  우리나라도 농산물 개방에 경쟁력이 있도록 하려면 우수 농산물 생산이 최우선 과제이고 선별 및 포장을 잘 하여서 소비자의 신뢰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하우스 내 딸기 재배 모습




◐ 부녀자 생활수기

 

 

 

 

촌부의 아내

 

 

 

최 금 숙

영암군 학산면 상월


  눈앞에 넘실거리는 풍요로움이 가득하고 정감이 넘치는 푸르른 삼월. 영암읍에서 목포간 도로를 따라 17km 지점에 이르면 학산면 소재지가 있고 여기서 6km쯤 멀리 우리마을이 있다.

  진솔한 나의 생활하는 모습을 적어본다.


  [촌부의 아내]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섭리의 근원을 알면서도 언제부터인가 이를 멀리하고 천대시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기계화사회,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가면서 차츰 차츰 인간의 마음속에 사리사욕이 자리잡고 생활은 날로 각박해져가고 있다. 나 또한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힘들게 일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편하게 해드려야지 하는 생각은 마음 뿐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집을 떠나 객지에서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그 생활습관에 젖어 마음만 있었다.

  물질문명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시골에서 구태여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생활속에 건강에 이상이 생기자 휴식을 취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우연히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군대를 막 제대한 까까머리 청년이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을 떠나 있던 관계로 농촌의 실정을 모르는 상태여서 어려운 문제가 많았다.

  야산을 허가받아 논으로 개간했는데 논이 아니고 온통 자갈투성이고 개간작업을 맡았던 업자들은 선량한 농민들을 우롱하는지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연로하신 부모님 곁을 떠날 수가 없었고 뭔가 일을 마무리하고자 이를 악물고 노력해 버려진 땅을 옥토로 만들고자, 흘린 땀과 눈물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절대로 고생하는 농촌으로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더더욱 장남에게는…. 그러나 절대로 부모님 원망은 하지 않겠다는 말을 뒤로 하고 결혼을 결심했다.

  막상 결혼해 보니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자유로운 생활에서 완고하신 어른들 조심하랴. 또한 집안이 워낙 커서 집안 청소 등 집안 일만 하여도 눈돌릴 틈이 전혀 없었다.

  움푹 들어간 시골의 전형적인 부엌은 어둡고 침침하고 밥상은 마루를 통해 방으로 가는데 끼니때 마다 “상좀 받아 주세요”해야 하며 오르락 내리락 처음에는 다리가 통통 부어 피곤함은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지만, 오랜 사회생활을 한 탓인지 아무리 늦게 자도 긴장감에 습관처럼 눈이 떠지곤 해서 어떻게 하루가 가는지 모르게 잘 가지만 대화 나눌 사람도 없고 대문 밖 출입은 물론이요 외출은 엄두도 내지 못할 사정이라 여간 답답한게 아니었다.

  이제는 4년 터를 닦아 자신이 생기고 집안형편도 달라져 모든 일이 잘되면 도시로 진술한다던 남편도 이제는 새로운 각오와 욕심으로 그 말썽 많은 땅, 온통 흙투성이 되고 한번 빠지면 나오기 조차 힘들었던 땅을 옥토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5년간 돌을 줍고 씨를 뿌려 가꾸니 누렇게 펼쳐지는 평야, 헛된 일이라며 야유와 반대로 대항하던 마을 사람들도 부러움에 찬사를 보내 주었다.

  없어진다던 도랑에는 물이 흐르고 넓게 확장되니 미안해 하고 우리가 개간한 논은 지하수가 많아 가뭄에 물 걱정 없이 수리세도 내지 않는 천혜의 옥토가 된 것이다.

  내 자신이 몸소 실천한 일들중 하나로 예금통장을 알뜰하게 이용하였다. 단돈 얼마라도 수익성 있게 해야 하는데 집안 어른들은 귀찮다는 이유로 현금으로 두거나 보통예금으로 예치해 두었는데, 어른들을 설득시켜 수익성 통장으로 교체하고 현금이 생기면 즉시 통장에 입금시키는 통장 위주의 생활로 집안에 현금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첫딸을 낳은 달 부터 계속 5일장날 마다 돈이 생기는 대로 조금씩 통장에 넣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지혜가 생겨 일년이 되면 이돈으로 5년 짜리 공제에 가입, 둘째를 낳고 이러한 방법으로 출생신고 통장을 이용해 조금씩이나마 저축을 해 가고 있고, 남편이 6남매의 장남인지라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고자 형제계를 조직하여 회비로 적금을 넣어 형제간의 어려움, 부모님을 위하여 쓰고 있다.

  또한 계획적인 가계 운영을 위하여 가계부 기록의 필요성을 느껴 막상 쓰려고 하니 제대로 잘 되지 않아서 어려웠지만 메모 형식으로 정리해가고 조목조목 결산해 보니 예상 밖의 많은 지출로 의구심을 느끼게 되어 더 절약하고 가계부를 계속 기록하여 가계운영의 지표로 삼아야 겠다는 마음으로 기록해 가고 있다.

  좀더 지출을 줄이고자 닭과 오리를 기르고 텃밭에는 시금치, 상치, 쑥갓, 아욱 등 각종 야채를 심어 사계절 싱싱한 채소로 가족에게 영양식까지 제공하게 되었다.

  한창 커가는 두 아이들을 위해서는 야채, 곡식가루를 이용하여 영양 간식을 해준 덕분인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계속해 나가니 집안에는 통장이 가득, 노력의 결실로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시부모님은 왜 진작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나 후회된다고 하시면서 아주 좋아하셨다.

  집 구조는 하나씩 단계적으로 개선, 결혼 첫해에는 창고를 늘리고 그 이듬해는 마당을 시멘트로 포장하고 금년에는 지도소의 융자를 받아 입식부엌으로 개량하였고, 모내기를 마친 후에는 목욕탕과 연탄창고를 짓고 슬라브지붕은 장독대로 활용하고 있다.

  농번기철에는 일손이 부족해 제때 모내기, 적기수확이 어려워서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그러나 이제는 농촌에 뿌리 내리기 위해 이앙기, 콤바인 등 농기계를 구입, 비싼 농기계라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었지만 절약하고 힘을 모아 잘 살아 보자고 하는 일이니 더욱 바빠질 것 같다.

  힘이 들고 고통이 따르겠지만 젊은이들이 우리 농촌건설에 역군이 되어야만 잘살 수 있다고 느꼈기에 주위의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 부녀자 생활수기

 

 

 

 

절약과 봉사정신의 참교육

 

 

 

정 경 숙

보성군 율어면 문양


  순천시의 아담한 마을에서 3남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 부유한 가정이라 별 어려움 없이 여학교를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의 도움 없이 혼자 살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독신을 주장했지만 부모님의 성화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으며 조그마한 목장도 경영하고 있었다.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보통의 아내 며느리로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는데 뜻밖의 시련이 닥쳐왔다.

  6.25때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계시던 시어머님께서 중풍으로 거동을 하실 수 없게 된 것이다. 거기에 겹쳐 기대를 걸었던 소마저 병이 들어 한마리 씩 죽어가고 가산은 점점 기울고 시어머님의 병세 마저 악화되어 4년간의 병간호에도 보람없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재산은 하나도 남지 않고 맨 주먹으로 고향을 떠나 1970년 이곳 산간오지인 율어면으로 이사와서 정착해 살고 있다. 처음 세 식구가 이곳에 정착하였지만 생계는 더욱 막연하고 낮에는 채소장사, 빵장사, 날품팔이 등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였고 밤에는 마포를 생산하여 조금씩 절약하고 저축하였더니 4년후에 지금 살고 있는 집 한채를 마련하게 되었다.

  남편은 1975년에 외항선을 타기 시작해 18년째가 되었다. 휴가는 몇년 만에 한번 나오기도 하고 월급은 매월 보내주었다.

월급은 꼬박 꼬박 저축을 하였는데 아이들이 남의 집 사는 것을 보고 부러워 하면 아빠 오시면 우리도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좋은 옷도 입고 살자 하며 달래며 살아왔다.

  어렵게 살아오면서도 항상 정직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살아온 결과 주위에서 인정해 주었는지 1982년에는 마을 생활개선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전에도 생활개선회가 있기는 했으나 형식적이었고 활성화되지 않았다.

  우선 회원부터 구성해야겠기에 집에서 찰밥도 해놓고 떡과 식혜 또는 과일 등을 준비하여 모이게 애를 써 보았지만 성과가 없었다.

  지도소 및 각 단체에서의 교육에 꾸준히 참석하여 배운 것은 부녀회 모임때 가르쳐 주기도 하면서 노력한 결과 13번째 모임에서야 성공을 하게 되었다. 부녀자들이 함께 노력해 집안과 마을의 생활을 개선해 나갈 것을 앞장서자고 결의하였다.

  회장으로서 마을의 애경사 때에는 한집도 빠짐없이 내일같이 정성껏 거들어 주었고 마을 부녀자들이 공동으로 구매사업도 실시하였다. 구매사업은 비교적 잘되어 생활개선부 기금이 늘어갔으나 매년 한두 번씩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관광을 다니던 습관이 있어서 회원들이 때가 되면 그 유혹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였다.

  관광할 돈을 아껴서 저축을 하자고 몇번을 설득 각자 통장을 갖게 하고 금액이 늘어나면 돼지를 사서 길렀다. 그걸 보고선 모두들 함께 참여하기를 원해 56명의 부녀자들이 1인1통장 갖기를 실시하고 있으며 7년동안 관광차 한번 대절하지 않고 저축하였다.

  또 한 달에 한번씩 저축을 하기로 해 쓰기만 좋아하고 저축하는 것을 기피하는 부녀자들에게 저축의 중요성과 보람을 일깨워 주었다.

  저축한 돈으로 염소나 닭등 소가축을 사서 길러 영양식품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송아지를 사서 집안살림에 보탬을 주기도 하고 부엌개량을 하여 괘척하고 편리함에 주부 자신에겐 즐거움을, 가족의 건강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집안 애경경사때에 찾아서 쓰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흐뭇하고 애쓴 보람을 느낄수 있었다.

  한달에 2회씩 쓰레기 분리 수거로 나온 폐품을 수집하여 기금조성과 환경을 깨끗이 하기에 힘썼다.

  지도소에서 배운 병조림법을 마을 부녀자들과 함께 실습하여 저장식품으로 두고 먹기도 하고 불우 이웃에게 선물하기도 하였으며 영양개선 연수원에서 배워온 개량메주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어 함께 만들기도 하고 시장에 내다 팔아 기금에 보태기도 한 결과 500만원의 기금이 모아졌다.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많은 활동을 하고 여러 사람과의 대면을 하였지만 얼굴에 화장 한번 제대로 안하고 맛있는 것도 덜 먹으며 좋은 옷 한번 입어보지 못하면서 오직 근검절약 하면서 큰옷을 못입게 되면 줄여서 불우 어린이들에게 입히고 겨울에는 뜨게질을 하여 불우노인에게 드리면 좋아하시는 모습에 기쁘고 보람되게만 느껴진다.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아온 시집간 딸은 해마다 어버이날이 돌아오면 늙고 외로운 할머니께 드리라며 옷과 꽃을 보내는 걸 보면 흐뭇하기 그지 없다.

  하루는 대학 2학년과 고3에 재학중인 두 아들이 “어머니께서 가정과 마을을 위해 고생하시는데 우리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 묻기에 “너희들은 항상 학생답게 공부 열심히 하고 근면 성실하게 살아가면 된다“고 하였더니 지금까지 용돈에서 조금씩 저축을 하며 모은 돈 45만원을 내놓았다.

  마을에 필요한 기금으로 썼으면 하는 것이었다. 정성이 고마워서 마을 공동 그릇을 사서 애경사시 가져다 쓰게 하고 있다. 절약하고 봉사하는 모습은 이렇듯 산 교육이 된 듯 싶다.

  ′89년부터 3년간 군 생활개선부장을 맡게 되면서 생활개선 사업에 더욱 관심과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지도소에서 실시하는 주거환경개선에 뜻을 함께하고 많은 농가가 부엌개량을 하게 되었으며 지도소 삽목상에서 묘목을 가져와 꼭 가정과 마을 안길에 심어 더욱 정겹고 살고싶은 농촌이 되기를 바랬다.

  91년 4월부터는 농촌여성 일감갖기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 마을은 보조는 못받지만 의미있는 부녀자 공동의 일감을 갖고자 300평의 공동 과제포를 마련 토란재배 사업을 하였다.

  부녀자들이 함께 김도 매고 비료도 주면서 정성껏 키웠더니 토란대와 알토란을 판매한 것이 180만원이 되었다. 토란대와 알토란의 판매에 그치지 않고 우리 농산물을 이용한 요리법, 저장법을 개발하여 토란 이용 요리를 생활개선 실적발표회시 출품,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수익금으로는 불우 이웃돕기와 장학금 경로잔치 등에 써서 보람을 느끼기도 했지만 더 크게는 우리 농산물 애용과 요리를 개발하여 널리 보급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에 더 큰 보람을 느낀다.

  올해에도 토란 300평, 참깨 50평 고추 800주, 콩 50평을 경작하고 있는데 더 큰 성과 거두리라 기대된다. 올해 다시 사업을 시작하면서 조그마한 꿈은 포장기계나 박피기의 구입으로 토란을 그대로 판매하지 않고, 소포장으로 상품화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싶다.




◐ 부녀자 생활수기

 

 

 

 

가계부 기록의 보람

 

 

 

한 하 숙

순천시 연향동


  우리 마을은 순천시 중심부에서 약 7km 떨어져 있는 도시 근교 농촌 마을로 총 가구수는 109호이며 농가와 비농가가 절반정도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다.

  내가 가계부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결혼초부터 시작해서 10년이 넘도록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해 오고 있다. 가족은 시아버님과 남편, 얘들 넷 이렇게 7명이고, 4천여평 되는 논농사를 절반은 우리가 짓고 절반은 남에게 빌려 주어 짓고 있다. 남편이 건축 미장 기술자로 나 혼자 농사일을 다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부끄러우나마 내가 그동안 10년 넘게 가계부를 기록하여 온 보람에 대해 남에게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몇가지 적고자 한다.

  처음엔 그저 기록하는 목적으로 가계부를 기록했었는데 농촌지도소 생활지도사의 지도를 받아 비목별로 구분하여 기록하는 방법을 알게 되어 예산을 세우게 되었고, 매주 매월로 결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집 형편에 맞추어 생활을 꾸려 가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지출이 컸음을 알게 되었다. 가계부기록이 익숙해지면서 저축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고 매년 조금씩 저축한 결과 어느 정도의 목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집은 전형적인 시골 기와집으로 대지가 73평 건평 22평에 방이 4개로 넓지만 불편하였다. 한꺼번에 집을 고치면 목돈이 들기 때문에 연차적으로 집수리계획을 세워 그에 따른 경비를 남편의 협조와 가계부 절약생활을 통해 마련할 수 있었다.

  1986년에는 천정과 목욕탕을 개조하였는데 스티로풀, 각목, 베니어판, 욕조, 타일, 시멘트 파이프 등을 구입하여 남편이 쉬는 날을 이용하여 수리 하였다. 1988년에는 농가 목돈 저축금을 찾아 부엌을 입식으로 개량하고 생활의 편리를 위해 가스레인지를 새로 구입했다.

  다음 해에는 연탄보일러를 기름 보일러로 바꾸었는데 가스값과 난방용 기름값이 월 4만원이 지출되어 우리 일반 농가의 수준으로는 과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일손이 바쁜 나로서는 기름보일러 사용이 오히려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매년 한가지씩 집안환경 정비를 위해 계획을 세웠고 그결과 차츰차츰 큰 부담없이 고쳐나갈 수 있었다.

  집을 개량하고 나니 생활에 필요한 가전제품과 생활용품도 한꺼번에 구입하면 무리가 되기 때문에 계획을 세워 연차적으로 구입키로 했다.

  제일 먼저 남편의 일에 도움을 주기 이해 85년에 오토바이와 87년에 리어카를 구입해 드렸고, 중고용 T.V를 아주 저렴한 값으로 온 가족이 안방에 모여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도 엄마의 근검한 생활을 잘도 따라주었다.

  몇년전 만칠천원에 사준 중고 자전거를 지금도 열심히 기름 칠하고 닦아서 타고 다니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남들은 대형냉장고며 새로운 가구로 바꾸고 온통 야단들이고, 쓸만한 물건들을 거리로 쓰레기장으로 내놓아 처분하기가 더 힘들다고 하니, 그저 지켜보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지출 뿐 아니라 수입면에서도 적극적인 수입이 이루어지도록 항상 노력했다. 벼농사나 맥주보리 농사에서 항상 1등급을 맞도록 노력했으며 목돈 마련을 위해 송아지를 길러 어미소가 다시 새끼를 낳으면 팔아 통장에 넣었고 고구마를 길러 생고구마대 판매대금으로 생활비를 융통하기도 했고, 농한기를 이용해 공사판에 파출부로 일을 나가 돈을 벌어 들이기도 했다.

  이렇게 열심히 계획을 세워 살림을 이끌어온 결과 세 아이는 무난히 대학을 졸업하여 저마다의 위치에서 제 역할들을 하고 있으며 막내 만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나는 대외적으로는 마을의 부녀회장을 맡고 있으며 자원봉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6년도에는 전국단위 부녀회 평가 결과 보사부 장관상을 받은바 있으며 농촌지도소와는 계속해서 인연을 맺어 가계부지도와 사례발표, 우수기록자 입상 등 알뜰살림 실천에 노력을 해왔다.

  이외에도 1988년 농민신문사 생활수기 모집에 응모하여 입선하였으며, 경향신문 농협중앙회 주관 사례발표에 참여하여 입선한 적도 있으며 1991년도에는 순천대학교 가정교육과 박옥임교수의 “농촌발전을 위한 농촌가정의 생활상에 대한 실증적 분석”이라는 논문에 내 가계부를 자료로 활용한 바 있다.

  이렇게 나는 가계부를 기록한 보람을 여러군데에서 얻었으며 앞으로도 더욱 착실하고 계획성 있게 가계부에 의한 살림을 꾸려가 네 아이들을 성장시켜 가정을 이뤄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으며 나의 남은 생활을 가정과 사회에 봉사하고자 한다.

  이 모든 희망과 결실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 나의 가계부 기록 덕택이기에 지금도 계속 기록 중이고, 앞으로도 열심히 기록할 것이다.




 

 ◐ 부녀자 생활수기

 

 

 

쓰레기! 이대로 좋은가

 

 

 

이 선 자

승주군 주아면 창촌


  산업화 및 소득수준의 향상에 따라 늘어나는 쓰레기 처리 문제는 환경오염의 차원에서 요즘 우리사회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중의 하나이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은 주암댐으로 잘 알려진 승주군 주암면으로서 광주 시민들의 상수도원인 주암댐 근처를 지나다 보면 광주에서 온 낚시꾼들이 엄연히 낚시 금지 구역이라는 푯말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낚시를 하면서 취사를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낚시밥으로 사용하는 떡밥이나 취사후 음식찌꺼기 처리, 몰고온 자가용 세차는 모두 주암댐 오염의 원인이 되고 있으므로 이런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처음에는 웬 여자가 남의 일에 상관하느냐 하는 식으로 대들기도 하고 얼굴에 불만이 가득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므로 나중에는 수그러든다.

  음식찌꺼기를 비닐봉지에 담아서 쓰레기장에 버리겠다고 해놓고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다 던져놓고 간다. 내가 버리겠다고 쓰레기봉지를 다시 가져와 쓰레기장에 버리고 왔다. 남이 보지 않는다 해서 적당한 장소에 쓰레기를 버리면 금수강산이 머지않아 쓰레기 강산으로 변할 것이다. 지금은 내가 살고있는 농촌에도 쓰레기처리 문제가 심각해졌다.

  재래식 아궁이가 취사 난방 연료일 때는 집에서 나온 쓰레기는 해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연탄ㆍ기름보일러로 거의 바뀌었기 때문에 쓰레기 처리 곤란과 연탄재라는 새로운 처리대상이 오히려 생기게 되었다.

  언젠가 해질 무렵 집마루에서 마을사람이 쓰레기를 몰래 다리밑에 버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뒤로도 몇몇 버리는 사람을 보고 반상회 때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던 중 이웃 마을 쓰레기 처리장 시설을 보고 면사무소로 찾아가 마을실정을 얘기하면서 쓰레기처리장을 설치해 줄 것을 건의했었다.

  다행히 일이 잘 되어 마을앞에 쓰레기처리장이 설치됐다. 그런데 타는 쓰레기와 타지않는 쓰레기 분리수거가 잘되지 않고 쓰레기 처리장이 멀다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 버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일은 남자 보다는 주부들의 행동과 의식이 중요하므로 생활개선회의 때 회장에게 건의해서 안건으로 내놓아 쓰레기 처리장 이외에 다른 장소에 쓰레기를 버리면 벌금 만원씩을 내기로 했다.

  그뒤로는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이 없어져 깨끗한 마을이 될 수 있었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에서 그 마을 주민들이 버리고 놀러왔다가 지나가는 길에 행인들이 버리면 공기좋고 물맑은 우리의 농촌 이미지가 조금만 지나면 파리가 들끓게 될 것이다.

  음식찌꺼기 또한 처치 곤란한 쓰레기이다. 같은 마을 식당에서는 바로 가까이에 있는 국민학교 선생들의 점심 식사를 해주고 있었는데 날마다 나오는 쓰레기가 개밥을 주고도 남는다고 한다. 요즘 어떤 식당에서는 음식물을 남기면 벌금을 내는 곳도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다른 쓰레기와 틀리게 재활용도 못하고 어차피 버릴 수밖에 없는 음식쓰레기는 낭비도 낭비지만 식량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난민들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내가 제안을 했다. 처음에 돈이 들더라도 구절판 몇개를 사서 반찬을 한 구절판에 4사람이 먹을 수 있게 조금씩 넣고 부족할 것을 대비해서 여유분을 따로 가져가 보라고 했다.

  의아심을 품으면서 시작한 일이 효과가 있었다고 나중에 식당주인이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거짓말 처럼 구절판에 음식을 조금씩 먹을 양만큼 넣으니까 남기지 않고 설겆이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깨끗이 먹고 여유분으로 가지고 간 것은 그대로 다시 식당으로 가져와 사용한다면서 반찬값이 많이 절약되니 오히려 더 경제적이고 음식찌꺼기 처리 문제도 해결되었다면서 아주 흐뭇해 했다.

  어디를 가나 눈에 거슬리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내 행동에 나를 똑녀라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혼자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바로 오늘의 환경오염 쓰레기 강산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특히 이런 일은 앞서서 이야기 했지만 남자보다는 우리 주부들의 의식이나 행동이 중요하므로 쓰레기문제의 심각성을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하고 한사람 한사람이 작은 일에서부터 쓰레기를 줄이는 일, 버려야 할 쓰레기나 음식물찌꺼기는 분리해서 버리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 부녀자 생활수기

 

 

 

 

작은 실천

 

 

 

박 순 님

담양군 월산면 동산


  우리 마을 안길에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아름드리 드리워져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바닥이 훤히 드러다보이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서 한낮의 더위를 잊게 해준다.

  동네 아이들은 이 시냇가에서 다슬기를 잡거나 끼리끼리 멱을 감기도 한다. 또 시골 아낙들은 머리에 빨래를 한통씩 이고 나와 빨래 방망이를 힘차게 내리치기도 하고 흐르는 물에 빨래를 헹구곤 한다. 이런 광경은 마치 한폭의 풍속화를 연상케 한다.

  항상 맑고 깨끗한 주위 환경을 가꿔가는 것이 우리 마을의 소망이지만 여기 저기 조금씩 오염된 구석도 없지않아 있다.

  물이 잘 흐르지 않는 웅덩이나 개울은 비누 거품이 풍선처럼 엉겨 있어서 주위 환경을 더럽게 하고 있다.

  매스컴에서도 ‘우리 한강을 되찾자’ ‘영산강을 되살리자’하면서 화면에 내비치는 강물은 시커먼 색에다 비누 거품이 솜사탕 처럼 부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질 오염의 주범 중의 하나는 가정 주부들이 자주 쓰는 합성세제라 한다. 농촌 주부들이 사용하는 양은 조금이라고 무시하기 쉽지만 우리들은 늘상 두손을 그릇삼아 자연스레 목을 축이기도 하지 않는가? 우리 마을 주민들도 생활개선 교육 때 올바른 세탁 요령을 익혔음에도 세제의 양을 조금 쓰면 찌든 때가 빠지지 않은 것 같다며 제시된 세제의 양보다 2∼4배 가량 더 쓰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우리는 흔히 이사온 집을 방문할 때면, 커다란 가루비누 한통씩을 손에 들고 방문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수질 오염에 영향을 주는 세제를 만드는 생산자도 문제 있지만 무심코 쓰는 우리 주부들의 무관심에도 커다란 문제가 있고, 환경 오염 심각성만 내세우고 방지책과 대책에는 소홀히 해온 당국도 책임이 크다.

  그러므로 우리 마을민이라도 합성세제를 덜 쓰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하던 중 작년 여름 생활개선 시범마을 순회 교육때 농촌지도소 선생님들이 폐식용유를 이용한 저공해 비누 만들기 실습을 해주신 것이 계기가 되어 생활개선부 중심으로 비누를 만들어 쓰고 있다.

  처음에는 폐식용유를 가지고 어떻게 비누를 만드나 하는 호기심과 소녀 시절 양잿물을 가지고 빨래를 했던 아득한 기억에 비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얼마후 관심있는 사람들과 비누만들기 실습을 하였다. 안전 수칙을 잘 지키라는 지도소 선생님의 말에 따라 양손에 장갑을 끼고 약간의 물에다 가성소다를 조금씩 넣어 저으니 따끈따끈한 열이 났다. 어떤 아주머니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왜 그러냐고 묻기도 했다.

  폐식용유를 조금씩 부으면서 일정한 방향으로 골고루 저어주는 과정이 있다. 이때는 조금 어깨가 아프기 때문에 생활개선부원들끼리 번갈아가며 나무 막대기로 젓다가 어떤 아주머니는 ‘비누가 만들어지면 나도 한장줘야 해’하며 열심히 젓기도 하고 ‘가성소다는 어디서 구하는 것이어’ 묻는 회원, 오고가는 이야기들이 정겨웠다.

  주고받는 대화 동안 폐식용유는 어느새 누런 빚으로 변해가고 저어주는 작업이 조금씩 뻑뻑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미완성된 비누를 사각틀에 비닐을 깔고 부어 2-3일 마른후 사용하기 적당한 크기로 칼집을 낸 다음 시원하고 그늘진 곳에 말리니 거의 흰 빛깔을 띤 비누로 완성되었다.

  마을 생활개선부 모임때 비누를 1장씩 나눠주고 세탁이 잘되면 같이 만들자고 제의했다.

  폐식용유를 이용해서 만든 비누는 기름 묻은 작업복, 양말, 걸레 등 때가 많이 묻은 빨래감 세척시 때가 잘 져서 세탁물이 깨끗해졌다며 좋아라 했다.

  주민 중에 닭튀김집 사람과 친분이 있어서 폐식용유는 얼마든지 준비되었고 가성소다는 장날 구입하였다가 젊은 부녀자 중심으로 비누 만들기를 했다.

  매번 비누를 만들어 보아도 어떤 것은 무르게 되고 비누 색깔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데 만드는 사람마다 다르고 정확한 재료량을 잘못 섞은 점, 또 젓는 방법 등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마을에서는 비누의 향을 좋게 하기 위해서 오이즙도 넣어 봤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이제는 거의 모든 아주머니들이 자신이 만든 비누를 자랑하듯이 서로 빌려주고 빌려쓰는 모습이 대단히 친근해 보인다. 또한 지도소 선생님들이 만들어 표본으로 나눠준 주방용 세제도 사용 해보고 자체적으로 만들었는데 너무 붉게 되어 쏠 수 없어서 지도소 선생님들과 같이 만드는 시간을 가졌다.

  폐식용유에 밥을 넣고 80℃까지 데운 후 가성소다를 조금씩 넣어가며 잘 섞고 또 물을 끓여 부은 후 40분동안 잘 저어준다. 2일 후 4일후에 각각 끓인 물을 넣어 잘 저어준 후 사용할 용기에 붓는다. 다 완성된 주방용 세제는 쓰기 편하고 기름때가 말끔히 빠져 우리 마을주부들에게 인기가 대단히 좋다.

  이와같이 비누를 만들어 사용하니 첫째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고, 둘째 비누 사는 번거로움이 없고, 셋째 수질 오염을 막을 수 있어 더욱 좋다.

  비누 만들기를 하면서는 온 주민이 열성적으로 협조해 주어서 추진하는 나로서는 대단히 뿌듯했다. 처음 시작은 어렵지만 먼저 실천하고 노력함으로써 다른 마을보다 훨씬 깨끗하고 쾌적한 전원을 만들어보리라.




◐ 부녀자 생활수기

 

 

 

 

몸소 실천해서 얻는 큰 기쁨

 

 

 

이 경 희

무안군 무안읍 용월



  학교갔던 이랑이가 책가방을 마루에 내던지며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큰소리로 엄마! 엄마! 하며 뛰어 들었다. 모처럼 가게를 쉬고 방에 누워있던 나는 깜짝 놀라 마루로 나갔더니 입이 함지박 만해져서

  “엄마! 얘들이 우리 엄마 최고래”하는 거였다.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어제 이랑이 생일날 증편으로 만든 케익과 쌀피자, 과일쥬스를 주었더니 항상 제과점에서 본 케익과는 달라 신기하기도 하고 맛도 좋았다며 모두 이랑이를 부러워했다는 거였다. 아이들끼리 한 말이지만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나는 중학교 다니는 준혁ㆍ국민학생인 이랑ㆍ아영 1남2녀를 두었다.

  도시에서만 살던 나는 농촌생활이 그림의 한폭 같이 생각되어 남편을 따라 시골에 정작한지도 벌써 10년이 흘렀다. 무지개 같은 아름다운 꿈은 사라지고 엄연한 현실에 부딪혀 살아가면서도 한가지 신념은 가지고 늘 생활하였다.

  내가 비록 시골에 살기는 하여도 가족들의 건강이나 자녀교육 만은 도시 어느 여자들 보다도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건강과 자녀교육에 관한 교육과 강연회 그리고 가능한 책을 많이 접할려고 노력하였다.

  부녀회장과 생활개선회장 등 사회활동을 하고 있어서 더욱 기회가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항상 결론은 조그마한 엄마의 정성과 사랑이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지켜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들은 실천하기도 전에 돈이 많이 들고 어려울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모두가 마음은 있으면서도 하는 방법을 몰라 실천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부족하지만 이번 이랑이 생일상을 차린 것을 비롯 내가 평소에 실천하고 있는 몇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렸을때부터 잡곡밥을 해서 먹이고 간식은 군것질을 시키지 않고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였다.

  또한 콜라ㆍ사이다 대신 수정과ㆍ감주를 먹였고 지도소에서 쥬스 만드는 법을 배운 뒤로는 제철에 나는 과일을 이용 연중 복숭아ㆍ살구ㆍ수박ㆍ자두 쥬스를 빠뜨리지 않고 꼭 해서 먹였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국민학교 아이들의 70% 이상이 충치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충치 하나 없이 모두 건강하다.

  이랑이 생일상은 제과점에서 케익을 사지않고 집에서 둥그렇게 증편을 만들어 건포도ㆍ땅콩ㆍ딸기로 예쁘게 장식을 하여 만들었으며 밥과 여러가지 재료를 섞어 만든 쌀밥크로켓, 양파를 옆으로 썰면 예쁜 링모양이 나오는데 그것을 계란과 빵가루를 묻혀 만든 튀김, 음료수 대신 미리 만들어 두었던 복숭아ㆍ자두쥬스 그리고 나의 자랑이자 특기인 쌀피자를 만들어 차렸더니 다른 어느 때 보다도 보기도 좋고 푸짐하였다.

  우리집에는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부엌에 있는 진열장이다. 값이 비싼 진열장이라서가 아니라 그속에는 우리가족의 건강을 지켜주는 여러가지 것들이 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쨈ㆍ쥬스ㆍ과일병조림ㆍ술ㆍ엑기스ㆍ차등… 나의 보물을 한가지씩 펼쳐 보이면 쨈은 마당에 있는 무화과를 따 만들고 올해 새로 지도소에서 마늘쨈 만드는 법을 배워 만들었더니 처음에는 마늘로 만들었다고 거부하던 아영, 준혁이가 무척이나 잘 먹었다.

  과일병조림은 이랑이가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황도가 많이 날때 병조림을 만들어 두었다가 겨울까지 먹곤 한다. 또한 이 병조림은 귀한 손님에게 선물로 드리기도 한다.

  남편을 위해서는 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병조림병에 고기를 여러 등분하여 담아 살균소독한 후 한개씩 터서 먹으면 변하지 않고 오랫동안 먹을 수 있어 좋다. 그리고 위가 좋지않은 그를 위해 매실 엑기스를 만들었다.

  술은 매실주와 진달래주를 담그는데 특히 고구마를 이용, 고구마술을 만들어 친척이나 남편 친구들이 오셨을 때 내놓으면 독하지도 않고 텁텁한 맛이 별미라며 좋아들 하신다.

  그리고 손님이 오셨을 때 외국산 차인 커피 대신 6월에 어린 잎을 따 만든 감잎차와 호박차로 대접한다.

  내가 실천하는 일들이 다른 엄마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갑자기 어느 신문에 기재된 꽁트가 생각난다. 건강식에 대한 강연회에 갔다가 잡곡밥이 좋다는 소리를 들은 엄마는 느낀 점이 많아 아이 도시락을 잡곡밥으로 싸줬다.

  학교갔다온 아이가 “엄마! 내일도 잡곡밥 싸줘”하는 거였다. 엄마는 너무 기특하여 “맛있어어?하고 물었더니 “아니 우리반에 어떤 애가 맛있게 보인다고 해서 바꿔줬더니 소세지, 돈까스를 줬어. 내일도 바꿔 먹을려고”하는 거였다.

  이 말을 듣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몰랐다.

  밥보다는 빵을, 김치보다는 소세지, 햄 등 인스턴트 식품을 좋아하는 아이들.

  엄마들은 “우리 아이는 밥을 먹지 않아요”하고 불평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것은 매스컴의 영향도 있지만 엄마들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신경을 써 아이들의 간식은 엄마가 직접 만들어 먹이면 편식도 하지 않고 건강한 아이로 성장하리라고 굳게 믿는다.

  오늘도 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간식을 준비하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세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신바람이 절로 났다.




◐ 부녀자 생활수기

 

 

 

 

4대를 지키는 가장

 

 

 

김 달 막

고흥군 도화면 신호


  이웃 사람들은 남편이 만약 정상인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을거라고 말들을 했다.

  그러나 난 꼭 하느님이 계셔서 남편을 돌봐주리라 믿었고 그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연로하신 시할아버지와 시어머니, 뇌기능을 상실한 무능력한 남편, 국민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두 자식들을 거두어야 하는 4대 가장으로 나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그러나 어느 한사람 소홀히 어길 수는 없다.

  남편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2년전부터 고흥읍에 있는 식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루 1만 5천원의 품삯으로 매주 목요일 나주 국립정신병원에 입원한 남편에게 갈 차비와 병원비, 살림을 도맡아 하는 시어머니에게 몇 푼 쥐어줄 수 있는 여유와 적금, 생명보험을 넣기는 하지만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고 하기에는 너무나 옹색한 액수이다.

  그러나 내 앞에 닥친 현실을 결코 외면하거나 피하고 싶지는 않다.

  4년전 온 동네 궂은 일을 도맡아 하던 남편이 뇌진탕으로 쓰러져 한달 20일만에 겨우 깨어났지만 뇌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한가닥의 실날같은 가능성을 믿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 다녔지만 병세는 더 악화될 뿐이었고 그나마 있던 집안 살림도 기울기 시작했다. 퇴원을 시킨 후에도 남편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가 일쑤였고 그걸 지켜보는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보다못해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6개월 전 나주국립정신병원에 남편을 입원시킬 수 있었다. 나의 하루는 눈코뜰 사이 없이 바쁘게 지나간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대충 집안일을 해놓고 군내 버스를 타고 식당에 도착하면 8시, 손님이 뜸한 시간을 빼고는 도저히 쉴 짬이 나지 않고 저녁 손님까지 치르고 집에 도착하면 대개 11시다.

  시어머니에게 온종일 집안일을 맡긴 것을 미안해 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그렇기 때문에 애들 얼굴도 제대로 못볼 때가 많지만 아빠의 몫까지 하기위해 열심히 산다.

  훗날 남편이 정상인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지킨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살고 시할아버지와 시어머니가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것이 나의 작은 희망이다.




◐ 부녀자 생활수기

 

 

 

 

젖소엄마의 꿈

 

 

 

권 경 숙

보성군 웅치면 유산


  젖소엄마!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음매음매 낳은지 5일 밖에 되지 않은 송아지가 나를 어미소로 착각하고선 몸을 부비며 따라다니면 목을 껴안고 우유통을 넣어준다. 쪽쪽 빨아먹는 소리를 들으며 나 자신은 많은 송아지의 엄마가 되고만다.

  조용한 시골의 농가에서 5남2녀중 네째로 태어나 부유하진 못했으나 행복한 생활을 보냈는데 16세 되던 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오빠들은 객지에 나가 있어서 어머님과 함께 힘든 농사일을 해내야 했다.

  마을에 4-H를 조직하여 꿈을 키우며 저축생활을 신조로 삼고 보람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2년간 한푼두푼 저축한 돈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사고 꿈에 부풀어 있는데 오빠의 사업실패로 모든 꿈은 무너지고 ′74년에 시골에 꿈을 둔채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처음에 가정부로 취업을 했는데 그 집은 고등학교 교사로 있는 가정인데 농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부유한 생활을 하고있는 가정이었지만 계속되는 부부싸움에 행복이란걸 찾을 수 없었다.

  난 거기서 부자라고 다 행복한건 아니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런 부모 아래서 자란 얘들이 진실된 행복을 알것인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6개월 후 주인의 주선으로 어느 유치원의 사원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부유함과 가난함! 너무나 하늘과 땅 차이였다. 유치원생들의 도시락은 시골사람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외제식품들, 그러나 그 음식도 싫다고 버리는 얘들, 부족함이 없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부족함으로 꽉 차 있는 저 얘들이 자라면 과연 진실된 저축과 낭비를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 자녀들을 위해 낭비라는 걸 모르고 낭비를 하는 그 부모들이 불쌍한 생각마저 들었다.

  쉬는 날인 수ㆍ일요일엔 파출부와 청소부로 날일을 다녔고 밤에는 쥐포 가공 일을 하였으며 방학기간 동안에는 공장에 나가며 궂은 일 가리지 않고 일을 하였다. 주위에선 억척스런 처녀로 통했지만 그러나 시골은 잊을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시골풍경 ….

  나의 꿈을 키울 수 있는 곳은 낭비 많고 인색하며 아부하고 인간차가 심한 서울이 아니라 따스한 인심, 자유로운 생활 거짓 없는 땅에서 얼마든지 노력의 댓가를 얻을 수 있는 시골이라는 걸 잊을 수가 없었다.

  ′78년 5월 1일 이제까지 모은 재산의 전부인 전세방 하나를 동생에게 주고서 시골로 내려왔다. 그 뒷날 시장에 나갔다가 동네 아저씨의 주선으로 현재의 남편인 돼지 팔러 나온 총각과 갑작스런 선을 보게 되었다.

  2남7녀 중 차남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5단보라는 논이 총각 앞으로 이전되어 있다는 말과 성실해보이는 모습에 결혼을 했는데 15단보의 논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었고 남편 또한 19세때 다친 다리를 돈이 없어 고치지 못하여 힘든 일은 할 수가 없었으며 결혼기념으로 준 한번 넣은 백만원짜리 새생활공제 통장 하나가 재산의 전부였다.

  부푼 꿈으로 시작된 생활에 충격을 주는 사실이긴 했지만 남편의 따스한 사랑에 용기를 갖게 되었다.

  저축 만이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라며 남편을 설득하였지만 쓰기도 부족한 형편이라며 저축은 엄두도 못내었다. 남편 몰래 1년제 30만원 짜리 적금을 시작하였다. 결혼한지 두달 만에 남편은 돈을 벌어오겠다며 서울로 떠났다.

  동네에서는 혼자서 어떻게 시어머니 모시고 사느냐며 애처롭게 생각해 남편따라 집을 떠나라고 말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그래서는 아니된다 다짐하며 남편의 몫까지 열심히 농사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다음해 4월 큰 딸 보경이가 태어난 후 남편은 돈 한푼 없이 돌아와 딸을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10번 넣은 적금통장을 내놓으며 남편을 설득, 고향에서 꿈을 키우며 열심히 살아보자고 남편과 굳은 약속을 하고 출산 후 3일만에 들로 나가야만 했다. 자식에게 만은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을 했다.

  막내 시누이가 대학에 합격하였으나 돈이 없어 입학하지 못한게 너무 마음이 아프고 미안한 일이어서 남편은 가난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잘살게 되면 장학사업을 하여 돈 없어 학교에 못가는 학생들을 위해 배울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였고 새옷 한벌 제대로 사입지 못하고 남의 헌옷을 입곤 하였다.

  농한기 때에는 밥장사도 하였고 남의 집 노동일을 하면서 노임을 착실히 저축해 나갔다. 한푼, 두푼 모아지는 재미는 정말 마음이 흐뭇하였다.

  4년 후 적금 2백만원과 그해 농사지은 이익금으로 7백60평이라는 우리땅을 마련할 수 있었다.

  ′84년 남편이 낙농을 시작해보자고 해서 3월에 저축된 돈으로 태어난지 7일된 송아지를 3백40만원에 두마리를 구입하였다. 5월엔 300만원을 대부받아 암송아지 한마리를 더 구입하였는데 경험도 없고 자본도 없이 이겨 나가기란 정말 힘에 겨웠다. 소 값은 계속 폭락하였고 농사지은 것은 소사료 값으로도 부족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소들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 잘 자라 12월 18일 첫 송아지를 낳았다. 그런데 어미소가 갑자기 아무것도 먹지를 않아 날마다 포도당을 놓으며 밤낮 소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새끼소도 추위에 견디다 못해 병이 들어서 안방에 까지 데리고와 며칠밤을 송아지와 지내야만 했다. 다행히 소들은 다 회복되어 송아지는 35만원에 팔았다. 우리가 구입할 때의 1/4도 안되는 가격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면서 우유값이 나오는 대로 저축을 해나갔다. 소는 늘었지만 초지 없이 풀을 베어다 먹이자니 온 들판을 헤매야만 했으며 새벽 4시반이면 일어나야 했다. 남편의 몸은 더욱 쇠약해졌으며 가끔 다리의 통증을 느끼면 죽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남편을 위로하기도 하였지만 눈물 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자인 내가 경운기 운전을 배우기 시작해 논과 밭을 갈고 로타리도 치면서 풀을 베어다 먹여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피로에 지친 난 신경성 저혈압으로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입원을 하라고 했지만 단 하루도 쉴 수 없는 형편이어서 다시 일어나 서로를 위로하며 계획을 세워보았다. 1990년 까지는 소를 15두로 확보하고 논도 10단보로 늘리자고 다짐했다.

  ′87년도에는 꾸준히 저축한 결과 3백50평이라는 땅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89년도에는 농지 구입자금과 3백만원의 적금과 농사수입 7백만원으로 논 1,580평을 구입하였다.

  ′90년도에 또 적금과 송아지 판매금으로 논 900평을 구입하였으며 ′91년 봄엔 지도소 융자로 부엌을 고쳐 입식으로 새로하고 나니 도시의 그 어느 부자도 부럽지가 않았다.

  그동안 폐품을 주워모아 애들 저금돈으로 주었더니 애들도 불어나는 저금통장을 소중히 여기며 빈병모으기 등에 앞장섰다. 사료포대는 모아서 비누와 그릇 등으로 바꿔썼고 소에서 나온 배설물을 퇴비로 쓰니 비료와 농약은 절반으로도 농사가 잘 되었다.

  소 키우느라 바쁜 중에도 틈을 내어 지도소 교육엔 빠짐없이 다니는데 분기마다의 생활개선부 과제교육때 배운 식품저장 가공법이나 취미 교양과제는 집에 와서 다시 한번 해보고 이웃에 전달하는 것 또한 잊지 않고 있다.

  올해에는 도배 기술교육 1기생으로 교육을 받아 우리집 도배는 물론 이웃집의 도배도 해주었으며 홈패션 교육과정에도 참가하여 내 손으로 이불을 만드니 너무너무 흐뭇하고 아이들에게나 남편에게 자랑스런 엄마, 아내로 인정받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올해엔 무엇보다도 기쁜 건 영농후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젠 더욱 열심히 노력하여 더많은 젖소들의 엄마가 되고 아픈 꿈으로 남아있는 장학사업을 꼭 해보고 싶다.

  “꿈이 있기에 저축을 하였고 저축을 하였기에 꿈을 이루었다”고 많은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결혼 14년간 꿈의 실현을 위해 저축을 하면서 화장품 하나 마옴 대로 사보지 못하고 옷 한벌 제대로 입히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조금도 후회 없이 자랑하고 싶다.

  낭비 많은 도시 사람들의 헌 옷이 여기의 새 옷보다 좋았지만, 호화롭고 돈많고 인색한 서울생활 보다는 노력의 댓가를 얻을 수 있는 인심 좋은 시골에서 행복하고 포근한 꿈을 이루는 것이 더 큰 행복이었다.

  시골에서의 꿈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갈 때 우리농촌은 더욱 살기좋고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농촌이 되리라는 굳은 믿음이다.




 

 ◐ 부녀자 생활수기

 

 

 

절약 너무 아름답다

 

 

 

윤 혜 정

나주시 향교동


  그렇게도 부드러운 흙이 호미 끝에서 흙 먼지를 그리며 나른다. 안타까움은 농축되어 가슴을 뜨겁게 하고 말라난 가는 이파리를 보면서 속수무책 있어야 하는 무능이 더욱 견디기 어렵게 하던 중 각심하는 것 가뭄이 있으니 대비하는 것이였다.

  그러고 보니 신혼시절의 슬프고 어려웠던 기억들이 입력되어 귀에 쟁쟁 눈에 선하게 흐른다. 사글세방 잘 살 수 있는 묘책도 기술도 재주도 없는 아낙이 전세로 또 내 집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절약 밖에 없는 것 같아서 실행하기로 하고 먼저 내 옷과 지아비의 남방과 바지를 만든다.

  옷감은 도매시장에서 사오고 아이들 옷은 아주 싸게 자투리를 이용한다. 좁은 방이지만 천을 조각조각 펼쳐 놓고 곰곰히 디자인을 생각하고 아이의 취향에 맞게 주머니를 달고 리본이나 단추로 악센트를 주어서 아주 훌륭한 옷으로 만들었다. 바늘 한 땀 한 땀에 흐르는 정과 피복비를 줄이는 길이기도 하고 못 쓰는 천으로 옷을 만들었다는 기쁨까지 함께 했다. 어린 딸아이 그 옷을 입고 놀러가서 돌아올 때는 “옷이 예쁘다고 많이많이 칭찬을 해 주셨어요…” 시종 어미에게 자랑한다.

  추운 겨울이면 털실을 이용해 부지런히 쉐타 조끼 덧버선 모자 등을 뜨게질 한다. 한올 한올 주인공들의 체형을 생각하면서 그 분의 착하고 좋은 점 그리고 고마움을 음미하면서 완성했을 때의 환희와 보람을 표현하기는 너무 미흡하다.

  손수 만드는 것들이 가계에 보탬도 되었지만 인지상정이 나에게 보석 처럼 와 닿아 보람 있고 아름다움을 마음에 심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약에 으뜸인 것은 불모지 공간에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싱싱한 야채를 먹을 수 있고 무공해의 유리함도 알고 부식비도 줄이고 이웃과 나눠 먹는 풍요도 느끼는 작업이다.

  썩일 수 있는 쓰레기는 썩혀 유기질 비료로 쓰고 태울 수 있는 쓰레기는 태워 무기질 비료로 쓴다. 쓰레기양을 줄이니 어쩜 숨은 애국자가 되는 듯한 자긍심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채소는 더 싱싱하고 맛이 있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 같아서 나만이 느끼는 풍요속의 기쁨이고 수확이다.

  야채를 구하기 위해 시장에 가지 않아도 되고 맛있게 먹다 부족하며는 빨리 몇잎 따 와 씻어 식탁에 올리는 기쁜 마음, 절약의 공로로 사글세에서 전세 그리고 내 집을 소유했다.

  뜨락에 과일나무가 있고 흙내음이 싱그러워 한 옹큼 쥐어 본다. 어려웠던 셋방살이 수도세 전기세를 주인은 빼고 분담시켰을 때 추운날 아궁이에 물이 들어 와도 아쉬운 사람이 고치겠지 하는 인심, 집보는 담살이 처럼 집 보는 걸 권유할 때, 6개월이 계약기간인데 터무니 없이 방세를 올리는 인정. 이런 자극들은 절약 절약해서 내 집을 소유하고 싶은 희망 뿐이었다. 절약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했다. 버릴 수 있는 것도 다시 한번 생각해서 버리고 아주 짧은 실도 사용했다.

  반드시 절약은 아름다운 결과와 보람을 주는 것이 기정사실이고 진리를 동반하는 교훈이었다. 이제는 내 이웃을 위해 눈을 뜨고 한번 더 절약의 아름다움을 보여 줄 참이다.

지금 세대는 물질이 풍부해서 다 잘 산다 역시 지금 생활은 여유가 있지만 절약하면서 지아비를 위해 소찬을 마련하고 자식을 위해 천 조각으로 옷을 만들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 늘 그 시절로 나르곤 한다.




◐ 부녀자 생활수기

 

 

 

 

앞서가는 금천 생활개선부

 

 

 

김 점 숙

나주시 금천면 원곡


  앞으로 우리 농촌은 젊은이들이 없고 부녀화, 고령화 되어가는 시점에서 “우리 부녀자들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는 목표를 걸고 89년 2월 17일 금천면 지도소에서 이 정수 소장님과 군생활개선 계장님, 황영철 선생님을 모시고 회원 21명으로 금천면 생활개선부를 조직했다.

  운영면에서 회원들의 바쁜 농사일에도 잠깐 시간을 내어 한자리에 모여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농촌을 묵묵히 지켜나갈 회원들과 앞서가는 우리 농촌이 될 수 있도록 먼저 생활개선에 중점을 두고 우리 회원은 부엌개량, 목욕탕 개량 사업으로 90년도 입식부엌, 목욕탕 보조금과 91년도 융자사업으로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군 지도소의 생활개선 교육과 식생활 교육 등 여러가지 교육을 통해서 우리 회원들은 많은 도움을 받고 있으며 92년도에는 한개 면에 한 부락씩 시범마을을 정해서 부엌, 목욕탕 개량 사업을 3년에 걸쳐 15농가를 지원해 준다고 한다.

  우리 금천 생활개선부에서는 특히 회원 상호 친목과 불우이웃돕기, 회원들의 교양이나 취미 등 모범농가 현지 시찰 등을 통하여 생활개선에 힘쓰기로 했다.

  우리 생활개선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 기금이 있어야겠기에 회원들의 능력에 맞춰 졸업식 때 꽃 판매를 시작하여 50여만원의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그 이익금으로 우리 면에 있는 “금성고아원”을 찾아가 위문을 했으며 90년도 군 연시총회때는 금천면 생활개선부에서 기금조성, 가계부 쓰기, 회의록 작성면에서 1위를 했다.

  91년 4월 20일에는 군민 체육대회를 금천면 원예 고등학교에서 개최하여 우리 생활개선부에서는 “향토음식, 전통차”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동동주, 파전, 호박차와 쑥차를 판매하여 80여만원의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그 해 가을에 면민 체육대회 때에도 판매사업을 하여 50여만원의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체육대회가 끝난 날, 우리 회원들은 체육대회를 주선하느라 애 쓴 청년회원들과 주민들을 한자리에 초대해 동동주와 파전으로 대접했더니 너무나 다 좋아하면서 이런 일은 매년 계속해서 해야 한다면서 앞으로 적극 협조해 주겠다고 격려를 해 주었다.

  이렇게 마련된 이익금으로 91년 12월 20일에는 “소년소녀 가장(20명) 돕기”를 면사무소 회의실을 빌려 각 기관장님을 모시고 조촐하게 실시하여 면민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들었다.

  불우 이웃돕기를 하고 난 뒤, 우리 회원들은 하나 같이 하는 말이 판매 사업 때 힘들고 어려웠던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이렇게 보람된 일을 하게 되어서 기쁘다면서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고 훈훈한 마음들을 서로 나누면서 앞으로 알차고 단결력있는 금천 생활개선부가 되도록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우리 금천 생활개선부는 풀내음과 벗하며 흙과의 쉼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나날이 발전할 수 있도록 우리 회원 전원이 하나의 촛불이 되어 우리 농촌을 위해 빛을 밝힐 것이다.

  우리 회원들의 가정에 항상 건강과 기쁨이 가득하시길 간절히 기원한다.




◐ 부녀자 생활수기

 

 

 

 

배우며 호흡하며 사는 세상

 

 

 

이 광 희

구례군 문척면 토금


1. 푸른 자연과의 만남


  물좋고 산좋은 장수지방 구례!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고 생활하다가 결혼과 더불어 시골생활, 농촌생활을 하기로 하고 이곳 구례에 오게 된것이 어언 12년째로 접어든다.

  어렸을때부터 막연히 대문이 없는 넓은 집, 방이 여러개 있고 먹을 것이 잔뜩 쌓여서 누구나 와서 즐길 수 있고 피곤하여 쉼이 필요한 사람이나 마음이 괴로와 어딘가 가고 싶을 때 찾아올 수 있는 그런 집을 짓고 살리라 꿈꾸어 왔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내 생활은 어릴 때 꿈꾸던 이상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 다닐 때 만난 지금의 남편도 나와 마찬가지로 도시에서 자란 전형적인 도시인이었으나 농촌에서의 삶을 계획하던 나와 뜻을 같이해 결혼과 더불어 이곳 구례에서 우리들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도시에 비해 여유가 있는 농촌생활에 만족을 느끼며 살고 있었지만 단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나를 키울 수 있는 취미 활동의 기회가 드물고 문화적 혜택에서 소외된다는 것이었다.


2. 내마음의 학교


  그러던 중 우리 마을에서 겨울철 영농교육이 있다고 하여 주위 사람을 따라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때 까지만해도 농촌지도소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전혀 몰랐고 별다른 관심도 없었다.

  그날 생활개선 계장님으로 부터 생활개선사업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지도소에서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교육장에 진열된 전시물들 가운데 가장 나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갖가지 공예품들이었다.

  박공예, 동판공예, 양초공예, 솔방울공예 각종 홈패션 작품 등 평소 배우고 싶어했던 것들이 나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이날 교육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한번 또 한번 지도소 나들이를 하게 된것이 요즘은 지도소에서 실시하는 교육이라면 한번도 빠지지 않는 열성 교육생이 되었다.

  지도소를 맨처음 찾은 것은 생활과학 실습실에서 동판공예를 하는 취미 교실에 참석하기 위해서 였다. 나에게 조금은 낯설은 생활과학 실습실 모습을 상상하며 지도소에 도작했다. 교육장소를 알리는 표시판을 따라 다가갔을 때 먼저 온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왔고 새로 입학하는 신입생  처럼 기분이 새로웠다.

  실습실 문을 열었을 때 사방을 장식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실습 기구들, 씽크대와 매직쉐프, 전자 레인지를 비롯해 전기 재봉틀, 장식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먹음직스런 병조림들과 작업복, 우리 여자들에게는 생소한 건축자재들, 솜씨를 자랑하며 걸려있는 앞치마, 가방, 홈패션 작품들.

  “아! 이런 곳이 있었구나!”

  첫눈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었다.

  공공기관의 딱딱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아닌 온화하고 내집과 같은 편안함을 주는 교육장이었다.

  열성적인 강사와 지도사님들 때문에 저절로 흥이나서 동판 작품도 쉽게 나왔고 액자에 끼워 놓고 보니 내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근사한 작품이 되었다.

  3월달에는 등공예를 했는데 동판과 달리 섬세한 손길을 요하는 것으로 마치 정신수양을 하는 것 같았다. 등공예를 할땐 남편도 나와서 도와줌으로써 다른 교육생들과 지도사분들의 부러운 눈길을 받았다.

  취미교실을 비롯해 갖가지 생활기술 교육, 유명한 교수님을 초빙한 교양 교육 등 진정 내가 원했던 내용을 접하면서 비로소 그동안 조금은 비어 있었던 가슴이 채워진 듯 하고 수그러졌던 배움의 싹이 다시 꿈틀거림을 느꼈다.

  얼마전 전라남도농촌진흥원에서 주관한 농촌 여성지도자반 교육에도 참석했는데 흥미있는 교육과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뿌듯한 마음과 즐거움으로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 모른다.

  지도소에서 실시하는 여러 교육을 받으면서 다시 한번 나의 위치와 나의 삶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마지막으로 농촌의 흙을 밟고 사는 우리들에게 다양한 교육 기회를 갖게 해 준 농촌지도소에 다시한번 고마운 뜻을 전한다.




 

 ◐ 부녀자 생활수기

 

 

 

내 나름대로

 

 

 

주 경 아

곡성군 옥과면 용두


♣ 꿈 많던 소녀시절에서 생활 전선으로


  모든 면에서 부족할 따름인 나를 거울 앞에서 바라보며 남에게 내어 놓기엔 너무 부끄러워 몇번을 망설이다 펜을 들었다.

  동백꽃 붉게 물드는 여수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 후, 대전에서 약 3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였다. 그 당시 군인이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사글세 방부터 시작해 일년에 2번씩 이사다니는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남편의 월급봉투는 얇았고 결혼전의 빚까지 우리 부부가 책임져야 하는 신혼생활은 말이 아니었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밝은 미래를 기약하며 수많은 일거리, 부업을 찾아 열심히 일한 결과 남편의 봉급은 모두 저축할 수 있었다.


♣ 드디어 우리에게도


  82년 10월 남편의 발령지인 이곳 전남 곡성군 옥과면으로 이사했다. 광주에서 버스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이곳에 살면서 나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땅은 거짓없이 수고의 댓가를 돌려 준다는 너무나 식상한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늘 도시생활만 동경해 오던 나는 그동안 저축했던 돈으로 지금의 집을 샀다. 재래식 아궁이에 형편없는 화장실, 시원찮은 기둥들로 겨우 엮어진 집이었지만 삭월세 방만 전전하던 우리에겐 궁궐이었다. 동네는 약 50호쯤 살고 있었고 몇몇집만이 연탄 아궁이가 있었다,


♣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뒤로


  나는 제일 먼저 주부로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부엌부터 개량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궁리끝에 농촌지도소에서 실시하는 부엌개량사업 - 당시는 지금처럼 널리 홍보되지 않았음 - 의 도움을 받았다.

  남편은 사람들의 말이 무섭다 하여 연탄보일러를 고집했지만 나는 윗목 아랫목으로 나눈 절약형 기름보일러를 설치해 연탄 연료비의 1/2을 절감했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부엌개량을 실시하자 동네 사람들은 구경삼아 하루에도 몇차례 찾아왔다. 게다가 이런 시골에서 기름보일러라니 하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한마디씩 비아냥거렸다.

  부엌개량을 끝낸 후 나는 기존의 변소를 뜯어내고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했다. 동네 사람들의 거센 반발을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정화조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러나 그러한 설득은 시간이 흐를수록 실효를 거두어 현재 우리 마을 총 51호중 22호가 부엌개량을 완료하였고 목욕실은 14호, 변소 개량 19호로 90% 이상이 부엌개량을 하게 된 것이다.


♣ 생활개선 시범마을로의 변화


  ′89년 우리 마을은 지도소에서 선정한 생활개선 시범마을 중에서도 거점마을이 되었다.

생활지도사와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는 물론 마을 환경 미화 및 주민들의 의식수준의 향상으로 보조금을 주면서 부엌개량 사업을 하자고 해도 망설였던 사람들이 지금은 융자금 신청마저 경쟁율이 있어 부엌개량 사업의 파급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또한 우리 마을에는 남다른 점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부부 이름이 새겨진 문패이다. 출장나온 생활지도사 선생님과의 대화끝에 문패의 필요성을 느꼈다. 모든 농가에 부부문패를 다는 데는 어려움도 따랐다.

  동네 아이들이 주부의 이름을 알게 되어 함부로 불러댄다고 반대했던 몇몇 주부들도 지금은 매일 문패를 지나치며 작은 미소를 짓곤 한다. 주부 스스로가 가정의 중요한 일원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 해바라기 아줌마네 휴식터


  우리동네 어귀에는 은행나무가 3백여 그루 심어져 있다. 해마다 은행나무 아래 콩을 심어 자급자족은 물론 콩 사이에 꽃을 심어 아름다운 마을 환경 가꾸기에 나의 작은 힘을 보탰다.

  일이란 역시 누가 시켜서 할 때가 아닌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삶의 의미가 더해지는가 보다. 집안밖은 물론 마을 어귀 등에 과꽃, 봉숭아, 맨드라미, 해바라기 등을 심어 늘 꽃과 함께 살았다.

  해마다 담장에 해바리기를 심었더니 지금은 동네 꼬마녀석들 까지 해바라기 아줌마라고 부른다. 그리고 집뜰 한 쪽에 쓰레기 소각장을 설치해 웬만한 쓰레기는 집에서 처리하고 있다. 또한 각목과 못만 몇개 있으면 훌륭한 농기구 정리대가 되어 깔끔하게 정비가 이뤄진다. 우리마을 20농가가 이러한 정리대를 보유 활용하고 있다.

  우리집 동쪽 처마 밑에는 등나무가 엮어진 휴식공간이 있어 여름밤에 대나무 평상을 놓고 아이들과 함께 동요를 곧잘 부르는 사랑이 숨 쉬는 곳이다.

  한쪽에 상하수도 시설을 해서 남편과 아이들 샤워도 할 수 있도록 했다. 처음에는 파리, 모기가 들끓을 것 같아 염려했는데 1년에 몇차례씩 면보건지소와 연결, 방역소독은 물론 건강진단도 받을 수 있어 안심이다.


♣ 안방 가꾸기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그만큼 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 나는 대로 지점토, 등공예 등을 배워 익힌 솜씨로 서툴지만 집안을 가꾸는 데는 자신의 직품 이상 더 중은 것은 없을 것이다.

  침대 밑의 조명등은 독특한 몫을 하고 있다. 남면과 나, 누구든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조명등을 켜놓아 상대에게 신호를 주게 되면 부부싸움의 기회가 줄어든다. 사내아이들만 기르고 있어 삭막한 기운이 도는 것 같아 집안 분위기를 바꾸는데 여러모로 신경을 쓰기도 한다.

  새가구로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1년에 몇차례씩 가구의 위치를 바꿔보기도 하고, 방안에 두고 볼 수 있는 고구마, 양파, 콩나물, 버섯 등 15종 70여점을 수경재배하고 있다. 현재 이웃에 35호가 수경재배와 홈패션으로 안방가꾸기에 열을 내고 있다. 매월 1일과 15일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마을 입구에서 부터 집안밖에 이르기까지 제초 작업과 더불어 대청소를 하고 있다.


♣ 오뚜기처럼


  창고에 가득찬 볏집들이 뿌듯함이 아닌 한숨으로 들리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힘든 과정을 밟아야 결과가 빛나듯이 지금의 어려운 농촌 실정도 언젠가는 과도기를 넘어 평온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믿으며 오뚜기처럼 살아가리라 뇌어본다.




 

 ◐ 부녀자 생활수기

 

 

 

우리 마을의 ‘자랑 마을공동휴식터’

 

 

 

장 옥 련

승주군 해룡면 도롱


♣ 제4차 생활개선종합 시범마을이 되기까지


  ′91년 지도소 생활개선 실적 발표에 참석했던 것이 인연이라면 지도소와 우리 마을의 인연은 필연이라 할수 있다. 왜냐하면 실적 발표회때 듣게 되었던 승주읍 봉곡 생활개선회장의 생활개선 시범 마을 유치후 달라진 마을의 사례 발표는 실적 발표에 참석한 우리 마을 회원들의 마음을 충분히 흔들어 놓았고 그후 우리 마을은 제4차 생활개선 종합 시범마을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은 순천시에서 남쪽으로 6km 지점에 위치한 총 56농가 134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아담한 농촌 마을로서 마을 웃어른들을 내부모처럼 존경하며 이웃 사랑하기를 내 형제 처럼 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 우리 마을의 자랑 마을공동휴식터


  우리 마을은 마을내 노인정, 독서실, 마을회관 등 공공시설이 있지만 마을 주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 그래서 여름철이면 마을 사람들은 부채를 하나씩 들고 차가 쌩쌩 달리는 마을앞 도로를 건너 들가운데 서 있는 커다란 나무밑에 가서 여름밤을 보내기가 일쑤였다.

  이런 관계로 마을에서는 언젠가 부터 마을앞 도로를 건너가지 않고 마을 안 구석진 곳이라도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이런 우리마을 주민들의 마음이 마을에서 실시되었던 생활개선 실천농가 교육 후 마을 주민들과 지도소 생활개선계 직원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전달되었다.

  마을공동 휴식터 조성 선정 마을이란 통보를 받고 마을 대표들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기쁨도 대단했지만 그 기쁨과 함께 말 그대로 시범 마을이 되라고 지원해주는 사업이니 만큼 잘해야 된다고 마음을 합치는 결의도 대단했다.

  마을 노인정에서는 매일같이 마을 대표들이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연일 회의가 열렸고 심지어는 인근마을 유산각이나 파고라를 견학까지 가기도 했다.

  이런 심사숙고 끝에 마을 입구에 들어오는 풀이 무성한 공터에 파고라를 올려 등나무를 심고 탁자 의자를 설치하고 헌 타이어를 묻어 체련단련 장소로 만들기로 결정을 했다.

  공동 휴식공간에서 공동 작업을 하던 날은 마을 남녀노소 할것 없이 힘을 합쳐 풀이 무성한 장소를 말끔히 정리하고 흙을 떠다가 땅을 돋우는 등 마을 주민들의 마음까지 함께 묶는 공동 작업이 되었다.

  마을공동 휴식터가 조성되기까지는 마을 주민들의 협력이 대단 했지만 그중에서도 마을 노인정 회원들의 모범은 대단했다. 마을을 사랑하는 그분들의 순수한 열정은 7월의 뜨거운 햇빛도 아랑곳 하지 않고 파고라, 의자, 탁자만 덩그러니 설치된 장소에 잔디를 떠다가 심고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었고 등나무가 크는 동안 햇빛을 차단하는 차광막을 대나무를 베다가 엮어 파고라 위에 얹기도 했으며 노령자 교육때 배운 헌 타이어 설치법을 휴식공간 귀퉁이에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우리 마을의 공동휴식터는 10평 남짓의 작은 부분이지만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하나가 되는 장소가 되었다. 상수도 보급으로 정취가 사라졌던 옛날의 마을공동 우물가에서 교환되었던 아낙네들의 삶의 이야기가 마을공동 휴식터에서 다시 시작되었고 마을 할아버지 할머니는 객지로 나가 성공한 자식들 자랑하는 장소,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학생들은 책가방을 탁자위에 놓고 헌 타이어에 몸을 눕혀 피곤한 육체를 단련하는 장소, 들일을 하고 돌아오는 아저씨들의 쉼의 장소가 되었다.

  앞으로 휴식공간 주위에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 넝쿨을 올리고 각종나무를 심어 더 아늑한 휴식 공간으로 만들 예정이며 좀더 욕심을 부려 본다면 생활개선시범 마을이 끝나는 ′94년 생활개선 실적 발표회 때는 시범마을 후 달라진 우리  마을 모습을 승주읍 봉곡 회장님처럼 자신있게 사례발표를 할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의 아늑한 휴식공간 - 마을공동휴식터 -




◐ 부녀자 생활수기

 

 

 

 

아픔을 덜어주는곳

 

 

 

이 영 자

광양군 광양읍 초남


  “세월은 흘러가는 물같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어느덧 이 마을에서 생활하게 된 지도 벌써 30여년이 되고 있다.

  교사이셨던 아버지와 검소하시고 정숙하신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딸로 태어났다. 지금은 동광양시로 속한 골약면이 나의 고향이다.

  교사이셨던 아버지는 무척이나 교육열이 높으셔서 그 당시에 남자들도 보내기 힘든 중등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엄격하시고 보수적이셔서 집안 일이나 농사일은 집에 있는 일꾼들에게 모두 맡기시고 당신의 자식들은 책이나, 서예 그리고 수예 등 부모님의 뜻대로 배우도록 하셨다. 이러한 엄격하면서도 부모ㆍ자식간의 사랑과 형제지간의 우애 또한 무척이도 돈독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들으며 전혀 부족함 없는 젊은 시절을 보내었다.

  결혼 적령기가 되어 아버지와 같은 교사이신 분등 여러분들이 좋은 혼처를 중매하셨으나 어쩐 일인지 인연이 모두 안되고 지금의 남편과 우연히 맞선을 보아 이 초남리 현월에 오게 되었다. 약간은 넉넉한 시댁이었지만 그만큼 농사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농사일을 처음 접해 보았을 뿐 아니라 집안의 가사일까지도 거의 해보지 못한 나에게 새로운 생활의 적응은 정말이지 힘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지기 싫어 했던 터인지라 몸이 천근 만근 피곤에 지쳐 있어도 농사일에 집안일에 농촌 아낙네들보다 일을 더 잘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이렇게 열심히 생활하다 보니 마을 모임뿐 아니라 새마을 지도자 모임에서도 참석해 달라는 엽서나 공문을 받게 되었다. 나의 남편 또한 열심히 일하는 정직하고 근면ㆍ성실한 사람이라 이장직이며 새마을 지도자 등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막상 나 자신도 대표직을 맡고 보니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 초남리 현월을 광양에서는 잘 사는 마을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농촌지도소와 인연을 맺어 하나라도 배워 우리 마을민들에게 실천시켜 나가기로 했다.

  88년에는 농번기에 조금이라도 일손을 덜어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끝에 농번기 공동취사장을 운영하기로 결의하고 군수님과 출향 인사들에게 취지를 설명하여 허락을 받아내게 되었다.

  5백만원의 지원금으로 필요한 취사기구들을 갖추고 명실상부한 공동취사장이 건립되게 되었다. 지금은 농번기 철에 공동취사장으로 이용하고 농한기철에는 한쪽 방을 공단조성 인부들에게 빌려주어 마을기금조성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공동취사장이 세워지자 식생활에 대한 개선점, 홈팻션, 식품가공 등도 실천해 왔는데, 주변 환경정리도 해야 될듯 싶었다.

  그래서 먼저 마당이 흙이기 때문에 아무리 마루를 아침ㆍ저녁으로 닦아도 지저분한 것을 생각하여 마당에 잔디를 깔자고 제안했는데, 마을 어른들은 농촌 실정에 맞지 않고 귀찮다며 반대하셨지만 끈질긴 설득으로 심어 놓으니 보기도 좋고 비올 때나 휴식시에 너무도 좋아 많은 사람들이 동참을 하여 여름철에도 가을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모두 우리 마을에 오면 집집마다 모두 별장 같다면서 부러워들 한다.

  이렇게 잔디를 심어 놓고 나니 또한가지 주부들에게 가장 불편하게 다가오는 부엌에 대해 개량하고 싶었다.

엄두를 못내고 있을 때 농촌지도소 생활지도사님들이 방문을 하여 부엌개량 및 목욕실, 화장실 개량까지도 자세히 설명하여 주셨다. 융자금, 보조금 등을 지원해주고 기자재 준비물 구입하는 곳 등을 상세히 지도해주신 덕분에 마을 회의를 소집하여 희망자에 한해 부엌개량을 시작하였다.

 88년부터 한집 한집 개량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78호 농가 중 50%이상이 개량되어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엌개량을 하면서 알게된 군지도소 생활지도사님들이 가르쳐 준 병조림 만드는 것도 마을 모든 부녀자들이 알게 되어 제철에 나는 과일을 쥬스나 알맹이로 가공하여 언제 어느 때, 어떤 손님이 오시든지 아무런 걱정 없이 자신있게 접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이 지내오던 나에게 큰 시련이 다가왔다. 항상 나와 더불어 함께 하며 친구같던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남편 뒤를 따라갈려고 마음 먹을 정도로 허전함과 아픔을 맛보았다. 지금도 항상 곁에 있는 듯 하지만 그래도 그 아픈 충격에서 이렇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나에게 베풀어 준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생활개선부원으로서의 소속감인 듯 싶다.

  난 그 아픔뒤로 더욱더 마을의 생활개선 일에 충실하였다. 남편의 죽음을 잊어 버리려고나 하듯이. 생활지도사님들도 그러한 나의 뜻을 아는지, 이번 92년도 제4차 생활개선시범마을로 선정되어 다시한번 온마을 사람들이 뭉쳐지는 계기가 되었다.

  군지도소의 지원으로 농촌여성의 집이 설치되어 마을 부녀자들의 쉼터의 장이 마련되었고, 한명한명이 여성의 집을 꾸미려고, 집의 귀한 물건을 들고 나와 남편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기뻐하며 마을에 대해서 큰 자부심과 애착심을 가지는 그들과 그녀들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힘들었던 모든 일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공동취사장을 신축할 때 자금이 부족하여 발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후원자를 찾아서 돌아다닌 일, 부엌개량시 마을 어른들께서 쓸데 없는 일을 벌인다며 질타를 했던 일, 남편이 아무런 준비없이 세상을 떠나버린 일 등 그러한 아픔들이 지금은 아련히 스쳐지나가는 일들이 되었다.

  1남1녀의 자식이 있는데 이 둘 또한 나에게는 너무도 소중하고 효성스러운 더이상 부러울 것이 없다.

  앞으로 남은 일은 마을을 보다 나은 우리들의 가정, 우리들의 농촌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이다.




◐ 부녀자 생활수기

 

 

 

 

촌부의 삶

 

 

 

표 수 선

담양군 고서면 금현


  “농사짓는 마음은 우주의 뜻을 펴는 지순지고한 것이다”

  어느 농사 잡지를 필치는 순간 한눈에 들어온 이 글귀가 가슴 한곳을 뭉클하게 파고 든다. 12년째가 되는 결혼과 동시 농촌 생활이 아직도 익숙치 못하고 힘이 드는 것은 도시에서 자란 탓으로 지혜롭지 못한 때문인지 싶다.

  난방의 수단인 아궁이에 불을 지키기 위해 부지깽이 손놀림부터 낮은 부뚜막에서의 부엌일, 재래식 화장실, 울퉁불퉁한 돌부리가 튀어오른 좁은 마당, 집안 구석구석에는 농기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오래된 한옥인지라 방문도 제대로 맞질 않아 겨울이면 방안에 샛바람이 스며들어 코가 시린다.

  이런 환경 탓인지 아무리 쓸고 닦고 집안을 가꿔도 도통 빛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상하시고 따뜻하신 시부모님과 성실하고 믿음직한 남편이 곁에 있고 공부방과 책상을 갖추어 주지 못했어도 착하고 공부 잘해주는 대견스런 두 딸과 늦으막에 낳아 이제 9개월이 된 아들 태우의 재롱에 나의 생활은 하루하루에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마음 굳히며 농촌에 정착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불과 6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결혼전의 나의 환상적인 전원생활과는 판이하게 다른 농촌의 어려운 현실이 눈앞에 놓여 있었고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경제성, 문화 생활의 절망감에 현실 도피처로 생각되는 도시로 만 향하는 나 자신 마음과의 갈등과 방황속에 헤맸다.

  그러나 남편의 설득력 있는 행동에 머리가 숙연해졌고 땀흘리며 노력하는 만큼의 댓가가 주어지는 현실에 실날같은 가능성이 보이면서 도시로 향하는 길목에 서성이는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결혼기념일이나 아내의 생일을 기억하는 자상한 멋은 없어도 남편은 어떤 일이든 시작할 때는 신중히 검토하고 경험자의 의견을 경청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사는 동안 큰 실수나 실패는 거의 없었다.

  생소하기만한 흙과의 접촉, 퇴비 내는 일, 잡초를 매기 위한 호미질, 우사에서의 볏짚 절단하는 일, 배설물 치우는 일 등 모든 농촌일은 노동력을 요구했다.

  힘이 들지만 내성적이고 차분한 성격인 나는 인내력을 버팀목으로 삼고 일한 보람으로 수확 때에는 풍성하여 즐거움에 기쁨을 더해 주었다. 우리의 농촌 들녘에는 먹거리가 흐드러지게 널려있고, 사이다보다 더 시원하고 달콤한 천연수와 공해와 찌들지 않은 맑고 깨끗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어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게 된다.

  나의 인생 항로의 한 부분으로 기억 될 지난 1990년 9월에는 농민후계자 부인으로 구성된 ‘보람회’를 조직해 생활개선에 앞장서 쾌적하고 아늑한 의식주 생활에 입각한 교육과 선진 농촌 창조에서의 여성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이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동안 우리 부부는 근면ㆍ성실과 절약을 생활 신조로 삼고 가계부 기록을 하면서 저축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지금은 남편의 전문인 한우 비육 육성을 확장하기 위해 200여평의 대지를 구입해서 축사를 짓기위한 중장비 동원으로 터를 닦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또, 주택개량도 할 계획이다.

  농촌생활 12년째가 되는 1992년 이 시점에서, 어느 도시인 부럽지 않다고 생각되는 촌부인 나는 뿌듯한 마음에 망중한을 옛 성인의 말씀인 인간생활의 문장인 명신보감을 한구 한구 익히면서 삶의 방법을 모색해 본다.






 

 ◈ 시

 

 

 

인고의 당신

 

 

 

 

최 용 환

고성군농촌지도소


사랑하는 사람아

열아홉 갓너머

스무살 너의 만남

애띤 열븐 미소 회오리 방랑길

생(生)은 힘겨워

 

넌 어느덧

맨땅에 심겨진

간여린 어린목숨

잔뿌리 하나, 둘

해는 척척

타관 거리에 나그네 되고야

 

광음을 마신

뿌리

함성치는 줄기마다

아람진 토실밤 낳아

행복할거란 인고의 당신




◈ 시

 

 

 

 

남편의 빈자리

 

 

 

박 명 자

담양군 대전면 대치


은행나무 모퉁이를 돌아가는 남편을 부엌에서만

바라보노라니 마음이 아팠다.

내마음같아서는 버스정류장 까지라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어른들을 모시고 살다보니 그럴수는 없었다.

 

저녁상을 차리는데 왠지 기운이 없었다.

이것도 남편이 없는 탓인것 같았다.

무 생채에 고구마 줄기 무침을 하여

저녁을 먹는데, 온집안 식구들이 모였는데도

남편의 빈자리는 더욱 커보인다.

유난히 비빔밥을 좋아하던 남편인데, 무 생채랑,

고구마 줄기를 넣고 비벼먹는 남편의 모습이 떠오른다.

 

잘해준것 하나 없이 언제나 투정만 부렸는데

이렇게 반자리가 생기고 보니 더욱 절실해 느껴진다.

남편이 돌아오면 꼭 말해야지.

당신의 빈자리 유난히 커보였노라고 말이다.

그리고

영원히 언제나 우리 행복하게 살자고 말이다.



 

 ◈ 시

 

 

 

미래에 대한 작은 기대

 

 

 

 

윤 인 숙

장흥군 관산읍 외동


꼬끼오-

우는 닭울음 소리에

부시시 눈비비고 일어나

물동이 이고 가는

아낙의 옷고름 손에 쥐고

쫑쫑대며 따라가는

아이의 걸음에서

 

한여름 땡볕아래

새까맣게 그을려도

마냥 행복하기만한

작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속에서

 

칠흙같이 어두운 밤

이부자리 펴고

무릎꿇고 기도하는

어머님의 모습에

고사리손 합장하는

 

아이의 두손에서

 

미래의 밝은 횃불의 씨앗이

작게 타오름을 느낀다.


◈ 시

 

 

 

 

유 자 향

 

 

 

차 남 례

여천군 소라면 덕양


만추의 서릿발

노오란 향

피어낸,

 

수세월 각고 끝에

머물지 않음으로 가득찬

환희여

 

그러기에

네 향은

청초한 아픈가시로

만개 노란 송이를

힘껏 그려 보았다.


 

 ◈ 시

 

 

 

내일을 기다리며......

 

 

 

 

최 정 님

영암군 삼호면 서창


뿌연 연기를 뿜으며

아직 못다한 미련을 떨치려 몸부림 쳤던 지난 밤

내일이란 또 있을까를 고민하지만

변함없이 오늘은 어제의 내일

 

바람잘 날을 기다려 내 열손가락 끝을 헤아려 보지만

손안에 남는건 여느날 처럼

한줌의 미련과 한줌의 연민

언제쯤 끝이 날까

 

내두고온 그리운 땅

바람자는 날을 기다려

한소절의 노래라도 비처럼 뿌리련만

멀리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은 아련한 가슴마다에

멍울되어 번진다.


◈ 시

 

 

 

 

느      낌

 

 

 

김 난 희

진도군 진도읍 사정


만남과 헤어짐은

단 한순간도 우린 알 수 없지만

만남과 헤어짐은 하나님의 정하심이라

 

맑은 새소리 들려와도

우린 알 수 없는 비밀들로 가득함을

느낄 수 있으리

 

초저녁 둥글게 떠오르던 달님도

파아란 하늘의 피어남을 느낄때

작은 상처만이 남기고

스르르 꺼져감을 알 수 있으리

 

만나 사랑함을 느낄때

손을 내흔드는 서글픔을 맛보리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겨울은 안개속에

묻히지만

우리에게 남아있는 이 겨울은 더욱 많으리

 

너와 나 우린 느낄 수 있으리

 

안녕하며 돌아 설때

다시 환한 웃음 머금고 반가운

아침 이슬이 되어 만날 수 있음을 …


◈ 시

 

 

 

 

천년세월 푸른솔아

 

 

 

전 인 덕

순천시 농촌지도소


검은 고무신 움켜쥐고

뜀박질하던 그 길목에

천년세월 지켜온 푸른솔아

 

솔내음에 담긴

그윽한 고향의 숨결

언제까지 간직하련가

 

땅거미 내릴적

소를 모는 농부의

주름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메마른 대지위를 흠뻑 적실때

천년세월 푸른솔아

 

너의 그 변함없는 푸르름에

아낙네의 옷자락이

절로 춤을 추네.


 

 ◈ 시

 

 

 

들녁에 서서

 

 

 

 

윤 인 숙

장흥군 관산읍 외동


찌는듯 살속을 파고드는

붉은 너 태양아래

검은 피부 굵은 주름 깊은골에

어느새 쌓여진 근심의 흙 먼지여

 

내고향 내강산 내손으로 가꾸고자

아침이 저녁되고 저녁이 새벽되어

손마디 굵은마디 갈라진 틈 사이로

다시금 쌓여지는 야속한 세상이여

 

근심속 흘러가는 세월의 고리속에

어느틈 고개숙인 내분심 들판이여

쌓여진 근심과 야속함이

씻은듯 씻기워 지는구나


◈ 시

 

 

 

 

농      부

 

 

 

김 명 화

나주군 산포면 매성


당신의 인정이 있어

진정 들은 외롭지 않지요

당신의 무표정한 너그러움이 있어

들은 황금색으로 풍요롭지요

 

당신의 땀방울의 지극함이 있어

들은 진실한 아침을 맞는다지요

 

돌팔매 떨어진 자리에

노을 처럼 일어나는 열매는

당신의 고독입니다.


 

 ◈ 시

 

 

 

바다 ___ 그 고요

 

 

 

 

이 화 석

완도군 농촌지도소


때로 바다는 푸른 유리안 같아.

앞 섬이 제 모습을

그 위에 놓는 정막의 시간

잠시 쉼일까?

 

지난 겨울 영농교육

세찬 바람을 등에 업고

흔들리는 파도타고 보건소를 찾아들던

아낙은, 난관을 풀고 싶다고

품속의 아들이 바다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붉어지는 눈시울로

살포시 웃음 흘리었는데

누가 알까?

 

불목리 노인정에 홀어미들

왜 그리 많은지

장고소리 북소리에 실린 절절한 그리움

지나는 이 가슴 에이는 아니리 한 가락


제 안의 육신, 영혼들 보듬어 안고

달래듯 파도 다 재우고

그 살붙이 쓰린 마음 어루만지듯

제 가진것 하나하나 내어주며

 

때로 바다는 정녕 푸른 거울 같아

격정의 순간들 잠시 끊어

멈추게 하고 쉬고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멀리 청산가는 뱃길이 희다.


 

 ◈ 시

 

 

 

농군의 아내

 

 

 

 

배 성 희

무안군 청계면 서호

 

고요한 밤

깊이 잠든 당신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하루도 쉴틈없이 일에 쫓기는 당신 얼굴가득 피곤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깨워 같이 이야기하고 싶지만 고단한 모습에 차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작년 양파 심을 때는 꿈이 있었는데 …

양파 팔아서 제옷도, 만난 것도, 입식부엌도

해주마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했는데 …

우리의 수고뿐 생산비도 못나오메

당신의 이마에 주름이 하나 둘 늘어가 아내의 가슴엔 상처만

남습니다.

 

그러나

논밭을 버릴수는 없는 것

또 한가닥 희망을 찾아 당신은 또 열심히 일을 시작하고 있군요.

잡초 처럼 살아가는 인생일지라도 당신의 그 모습이

믿음직스럽고 거룩해 보입니다.

당신앞에 부족함이 너무 많은 이 아내는

차마 깨울 수 없는 당신볼에 가만히 입맞춤합니다.

 

◈ 시

 

 

 

 

아      침

 

 

 

엄 혜 경

구례군 문척면 월전


내 텅빈 가슴을 향해

한아름 하늘이 들어와 묻는다.

어둠은 손가락 사이로 걷히우고

새소리로 영혼은 잠에서 깨어나

동녁의 하늘

진한 노을에 꿈을 묻는다.

 

때묻지 않은 가슴을 가지고

또 먼 길을 가야할

내겐 이루어야할 모든 생각들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이술로 목축인 나무줄기 사이로

바람이 향하는 길이 보인다.


 

 ◈ 시

 

 

 

가      을

 

 

 

 

하 영 득

담양군 농촌지도소


가을은

완숙한 출산을 위해

숨을 거푸 몰아쉬고 있다.

 

태양의

노오란 빛깔만을 머금은

알알이 영근 저 태아들이

태양을 향해 모두 묵상을 하고 있다.

 

하늘은 온통 푸르고 푸르러

고추잠자리 한쌍 멱을 감고

곱게 차린 산마다

가을이 숨쉬고 있다.

 

떨어지는 낙엽속에서

부끄럼을 타는 벼논에서

가을은

조용히 익어만 간다.


◈ 시

 

 

 

 

농군의 모습

 

 

 

이 시 자

곡성군 농촌지도소


가마솥의 삼복더위 익어가는 여름철

한가로운 베짱이는 노래만 부르건만

주름골이 골골패인 밭고랑의 아낙네

떨어지는 땀방울 여념없이 일하네

 

천둥번개 먹구름에 화들짝한 참새떼

이리저리 분주하게 머리둘곳 찾건만

오랜가뭄 단비에 복사꽃핀 시골농부

우장메고 총총히 들로 모두 나가네

 

자고나면 슬며시 올라가는 물가고에

걱정하는 소시민 한숨두숨 가프건만

겸허한 농민들은 흙의진리 일깨우며

오늘도 묵묵하게 농사일에 전념하네




 

 ◈ 서간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주 봉 길

곡성군 농촌지도소


  50권의 전집 가운데서 가장 두껍고 가장 읽기 꺼려지는 책이었다. 그런데 50권을 마저 다 읽어야겠다는 단순한 고집으로 기어이 펼쳐들었던 책이다.

  그러나 마지막 까만색 크라운판 표지를 덮고 난 후의 감동이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이것을 카타르시스라고 하던가! 고3때도 밤을 세워본 적이 없는데, 유일하게 밤을 하얗게 지새워 읽은, 내가 가장 소중하고 감동깊은 기억이 되고 말았다.

  그토록 인생에 대해서 끝까지 집요하게 긍정적일 수가 있을까! 수없이 내 자신에게 자문자답해 보았다. 혹자는 스카알렛이 세번씩이나 결혼을 했다고 해서 부도덕하고 이기적이라고 얘기할지 모르나 남북전쟁 상황중에 아버지의 정신 이상,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오로지 땅에 의지하고 땅을 사랑하여 석양의 노을진 하늘을 향하여 “하느님, 다시는 굶주리지 않겠습니다. 도둑질, 강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결코 굶주리지 않겠습니다.”하고 절규할 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우리 농촌에도 참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운명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사는 여성이 많이 있다. 이런 분들께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이 책을 권해 드리고 싶다.

  아일랜드의 피를 이어받은 대지주의 딸로서 모든 경제적 부귀를 누리다가 갑자기 헐벗고 굶주리게 되었을 때 대개의 경우는 쉽게 무너지고 좌절하기 쉽다.

  앞으로 그러나 스카알렛은 운명에 대항하여 꿋꿋하게 버티어 하얀 장갑을 끼던 고운손으로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을 일구어 다시 옛날의 영화를 되찾는다.

  내가 어렵고 힘들다고 느낄 때, 쉽게 자포자기하게 되었을 때 스카알렛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어떻게 대처했을까를 늘 염두에 두고 '내일 태양은 내일 다시 떠오른다'는 희망을 갖고 긍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한다.




 

 ◈ 독후감

 

 

 

친구에게

 

 

 

 

김 명 숙

장성군 북하면 대흥


  긴 장마철 뒤, 약간의 구름은 있지만 맑은하늘, 따갑게 내리쬐는 햇빛아래 그리움 속에 펜을 들었구나.

  친구야!

  너와 나의 이별도 벌써 어언 10여년,

  만나는건 이별의 시초,

  사랑은 슬픔의 시초라는 말이 생각나는구나.

  너와 나의 아름답던 추억! 지울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뿐, 농촌 생활이라곤 전혀 알지 못했던 내가 시골로 시집을 와 한동안은 네가 부럽기도 했단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 농촌 생활에 익숙해진 지금은 네가 부럽기는 커녕 얼마나 보람찬 나날인지 모른다.

  친구야! 너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지. “넌 부자집 맏며느리가 될꺼야.”라고 “그래, 난 부자가 되었단다. 돈만 많은 사람이 부자가 아니고,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이 참된 부자이거든.“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 그리고 이르게 피어난 작은 코스모스 한송이, 그 가운데 나의 그을린 얼굴은 미소로 물들어 있단다.

  오랜만에 너와 나눠보는 여유있는 대화의 시간. 이런 시간이 한없이 연장된다면 얼마나 좋겠니?

어두운 밤이 지나면 맑고 밝은 태양이 비추는 아침이 돌아오듯이 시간이 허락되는 날 이루어질 우리의 만남을 고대하자꾸나.


 

 

1992. 7. 24.

진정한 너의 벗   명숙이가




 

 ◈ 서간문

 

 

 

아들에게

 

 

 

 

임 인 자

순천시 덕월도 801


  이제 벌써 8월인데 남은 달력을 쳐다 보면서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는구나.

  숨가쁘게 달려 온 듯한 세월, 그세월 동안 나는 무얼 했던가. 여자로서도 어머니로서도 썩 만족할 만한 날들은 아닌성 싶은데 나를 지나쳐간 그 숱한 나날들에 나는 무얼 했던가.

  후회란 아무리 해 봐도 소용없던 것. 돌이켜 본 지난날 꽤 긴 세월을 살아 오면서 엄마는 당당하게 말할수 없음이 참으로 부끄럽단다.

  남에게 모범이 되게 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적어도 제 자식에게만은 모범을 보이고 존경을 방고 싶어 하는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바램이란다.

  나는 비록 못났지만 내 자식만은 나보다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기대와 희망이 공부 잘하고 예의 바르며 학교와 사회의 모범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야. 공부 잘 하라는 말밖에 모르는 정말 재미없는 엄마노릇을 떠맡게 되었구나.

  간혹 신문지상에서 부모가 너무 무리한 요구나 기대를 하여 부담을 느끼는 청소년이 많다는 기사를 읽을때 내 자식도 그렇게 생각하나 싶어 가슴이 철렁하기도하고 반성도 하지만 부담을 줄 수 밖에 없는 엄마의 입장도 그다지 편한 것만은 아니어서 답답하고 괴로울 때가 많단다.

  지옥이라고 불리울 만큼 치열한 입시경쟁의 대열에 자식을 밀어 부치며 가슴편한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

  적당히 운동하고 좋은 책도 읽으면서 조용히 음악 감상도 하면서 머리도 식혀가면서 살면 좋겠지만, 대입을 목전에 두었다는 이유로 칼끝처럼 예민 해져서 가슴 조여야 하는 현실이 서글플뿐이다. 한참, 밝게 자라야 할 나이에 꼭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책과 시름해야 하는것이 안쓰럽고 지금의 시련이 더 나은 앞날을 준비하기 위해서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구나.

  사랑하는 내 아들아!

  몇 개월만 더 고생을 해다오. 엄마에게도 비슷한 시절은 있었단다. 시험 보는것. 석차에 신경쓰는게 지겨워서 어서 어른이 되기만을 바랬었단다. 어른이 되면 누릴수 있는 권리만 생각하고 그에 따른 의무나 책임은 몰랐던 철부지 일때는 어서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압박과 설움에서 금방 해방 될것만 같았는데 살아갈수록 세상일이 어렵게만 되더구나.

  노력하지 않고 내일을 기대한다는 것처럼 허황된 어리석음은 없단다. 세상은 노력한 만큼의 댓가만을 돌려 주는 법이란다.

  바라는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때 우리는 삶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지도 하지.

  그러나 좌절의 쓰리림을 맛보며 크고 작은 실패를 이겨가면서 사람은 조금씩 지혜로와지고 너그러워져가며 삶을 배워간단다.

  인생의 출발점에 서서 이제 힘껏 달려 나갈 일만 남아 있는 네게 부탁하고 싶은것은 오늘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이란다.

  이제부터 그려 나가야 할 인생이라는 그림에선 오늘 하루가 모두 소중한 밑 그림이 되도록 아름답게 채색 되도록 해야지! 너만은 밝고 건강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간섭을 했다면 용서해다오.

  그리고 이 엄마가 너를 무지무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다오.


1992년 8월 무더운 여름날 저녁에 너를 사랑하는 엄마가 쓴다.


◈ 서간문

 

 

 

 

존경하는 선생님께

 

 

 

문 공 주

여수시 연등등


  선생님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

  그간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을 해서 철이 없고 천방지축이었던 때 선생님의 반 학생이 되고나서 지금의 어엿한 중년으로 성숙했습니다.

  맨처음 선생님과 저희들과의 첫 만남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선생님과 학생 여러분들은 오늘로써 모두 한배를 탔기 때문에 무사히 항해를 마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 도우면서 협조해야만이 무사히 항해를 마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가장 현명하신 방법으로 제자들을 양성하셨죠. 화도 무척 내시고 사랑의 매도 많이 때리시던 선생님,

  철이 없던 우리들에게 선생님의 이미지는 무척 안좋은 이미지였습니다. 담임중에서 가장 무섭기로 소문난 우리 선생님, 선생님께 죄송한 일이지만 전 맨처음 제가 기대하던 담임선생님의 이미지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담임을 하시는 선생님들은 주요 과목인 국어, 영어, 수학, 과학…등인데 선생님은 예체능과목이셨죠. 음악, 미술도 아닌 무용선생님이셨죠.

  전 여선생님보다 남선생님을 바랬는데 우리 학교에서 가장 무서운 여선생님이 들어오시는데 앞이 캄캄했었답니다. 그러나 선생님 너무 서운하게 생각마셔요. 그때는 제가 철이 없는 탓이니깐요.

  지금은 제가 행운아라는 것을 늦게서야 깨달았어요. 저희가 잘못해서 사랑의 매를 때리시고 마음아파 하시면서 저희들에겐 보이지 않으시려고 돌아서서 우시던 날 우리반 전체가 울음바다가 된적이 있었죠.

  제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일기장을 선물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그리고 어렵거나 힘든일이 있거나 고민이 있을때 서슴치 말고 전화를 하라고 하시면서 사회에 나가더라고 남에게 지지않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말씀 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이번 스승의 날에는 꼭 찾아뵙겠어요.

  뵈올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 수필

 

 

 

 

봄의 생활예찬!

 

 

 

김 정 순

나주군 봉황면 황용


  과수원의 배꽃이 하얗게 활짝 피어났고 복숭아꽃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과수원은 이 화창한 봄날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본격적으로 농사가 시작되는 요즘, 과수원의 한 귀퉁이에 고구마씨를 묻다 말고 머-언 산을 바라다보며 남편과 연애시절 이맘때를 떠올려본다.

  꿈에 부풀어 산골짜기 초가지붕일지라도 사랑하는 이와 장래를 설계하며 시골생활에 익숙치 못한 나 일지라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행복할 것이라는 꿈속에서 장래를 설계하며 난 그이와 연애기간 7년 되던해 드디어 결혼을 하고 시골생활은 시작 되었다.

  그러나 그렇듯 행복할것 같은 결혼생활은 시골생활이라는 환경 부터 내겐 적응키 힘든 부분이 많아 시시 때때로 어려움에 부딛치고 지치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하루쯤 가족과 더불어 벚꽃구경이라도 가고프다. 사진도 많이 찍어보고싶다.

  결혼 16년 되었지만 지금의 마음과 나의 감정은 남편과 연애시절 못지 않는 새로운 사랑의 마음이 두 사람 똑같이 피어나고 있음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살아온 날들은 힘겨운 농촌생활의 연속, 경제적 어려움,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어려움 속에서 정신 없이 30대를 보내고 이제는 막내가 국민학교 3년생이 되고보니 아이들의 낮 시간은 거의 학교생활이고, 그래서 한가한 둘만의 마음과 시간에 우리 부부는 부부의 참 사랑을 다시금 맛보며 나날이 사랑이 새롭게 피어남을 느끼며 정말 행복함에 젖는다.

  흔히들 여성 40대가 되면 우울증과 더불어 온갖 갈등 속에서 그것이 지나쳐 불행으로 까지 치닫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나역시 40대의 자리에서 몇 해를 보내고 있지만 나의 마음은 전혀 그러함을 느낄 수가 없다. 오히려 더욱더 풍성함과, 가정의 안락함 남편의 사랑, 이모든것이 나를 감싸준 때문일까?

  농촌 생활이 어렵다고 모두들 떠나건만, 나역시 지금껏 너무 힘들어서 떠나고픈 충동은 있었지만, 그러나 너무도 순응하며 살았다.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인것 처럼 …

  그래서 인생길에 있어서 모든 어려움을 번거롭지 않게 순순히 받았다. 그 모든것을 극복한 지금 더 큰 행복함과 풍성함으로 살 수 있는지 모른다.

  남들은 딸만 셋인 우리 가정을 보고 아들을 두라고 걱정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린 전혀 염려를 해 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예쁘고 순진한 딸들을 주셨기에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분명히 자신의 중심이 바로 있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싶다. 나의 중심이 있기에 그 무엇의 유혹도, 그 누구의 나무람도 그 누구의 속임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할수록 나는 더 강하여지고 또한 마음속에 풍요로움과 기쁨만을 간직하며 무엇인가 베풀고 싶은 사랑이 내 마음속 깊이에서 싹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이웃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고프다. 옹졸하고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어른스럽게 행동하며 사고하면서 말이다.

  이 농촌을 지키는데에도 그냥 먹고 살기위한 수단으로 감당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온통 느끼면서 살고프다.

  이 맑은 공기 모든 식물이 자라나는 모습, 가을에 풍성하게 열리는 과수원의 과일들 이 모든 현상들을 보며 함께 젖어서 정말 보람과 더불어 행복함으로 느끼며 살고프다.

  UㆍR때문에 신경이 곤두 세워진 농촌 그러나 흙은 진실하고 또한 진실한 자만을 기다리며 반기는지 모른다.

  난 정말 갖가지 어려운 환경의 농촌 생활속에서도 농촌이 좋기만 하다. 그토록 뼈에 박힌 일도 아니건만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대하니 그 궂은 일 많고 힘들다는 과수원 작업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농촌의 영성들이여! 힘을 냅시다!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어느날은 뙤약볕에 검게 그을려 힘들게 일할지라도, 또 어느날은 풍성한 수확과 더불어 정말 보람을 느끼는 우리들이 아닌가?

  모두들 그랬을 것이다. 정말 꿈많고 멋진 인생설계하던 그때 호미자루 들고 밭 이랑을 가꾸는 꿈은 정녕 없었으리라!

  그러나 어떠한가? 막상 꿈이 아닌 현실에서 수건 둘러쓰고 호미자루 드는 모습일지라도 그 모습 내면의 우리들은 얼마나 부자들인가? 또한 절약과 검소함으로 인간의 양심을 간직한채 아이들에게 본을 보이며 그 어떠한 것도 부러움 없는 마음인것을 …

  누군가 그랬다. 행복은 저 멀리 산너머에 있는것이 아니고 내 마음속에 있다고.

  부부로 맺어 자녀를 얻어 한 가정을 이루며 농촌일에 힘든 우리들 그러나 우리들 손에 모든 농산물이 탄생하고 하늘의 섭리를 바라보며 사는 우리들이니 우리들은 정말 대단한 자들이 아닌가? 열심히 일하며 사는 모습처럼 아름다운 모습은 없는 것이다.

  이 넓은 공간 속에서 무공해 식품과 생수를 마시며 사는 우리들, 도회지 사람들 보다 더 행복한 조건들이 많은 우리들이니 긍지를 갖고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누가 만들어준 행복이 행복일까?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을 우리 스스로, 아니 내 자신이 만들어 보자.

  우린 모든 일에 결실을 맺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더욱더 나의 남편, 나의 아이들, 나의 이웃들, 또한 일을 사랑하면서 영원한 고향인 이 땅에서 흙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리라!




◈ 수필

 

 

 

 

흙의 모정

 

 

 

이 말 순

나주시 이창동


  떨어지는 노을 보다 떠오르는 태양을, 낙엽지는 가을밤 보다 꽃피는 춘삼월을 잔잔한 시냇물 보다 뿜어대는 분수를 좋아했던 그 소녀는 기저귀, 우유통이 잔뜩 든 검은 가방을 둘러맨 채 등에 기댄 아가의 숨소리에 신경을 모으며 걸어가는 아낙네로 변모한 자신에 깜짝 놀라곤 한다.

  한낮의 뙤약볕에 잠자는 아기가 깰까봐 파라솔을 뒷쪽으로 재치면서도 눈 가장자리에 생긴 기미엔 자외선이 좋지 않다는 상식 조차 잊어버린양 평범한 여인네로 변하리라 생각치 않았던 그 시절 「아스팔트」 「아파트」와 「샐러리맨」이란 단어 속에서 멋있게 젊음을 만끽하며 사는 도시 여성의 대표자로 미래상을 꿈꾸었었다.

  늘 빠짐없이 놓여진 김치와 하루하루가 비슷한 반찬을 대하면서 짜증부렸던 처녀시절을 생각하니 씁쓸한 미소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매 시간마다 오는 완행버스를 타고 5일장에 나가면 무우, 고등어, 멸치, 콩나물 등 별반 특이한것도 장만치 못한 채 빈지갑만 너털거리며 돌아와 텃밭의 상치에 된장을 곁들인 저녁상을 가족들에게 내밀때 친정엄마의 고마움을 뒤늦게야 느끼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숟가락질 하겠다던 돌지난 영아의 생떼부림에 여기저기 흩어진 밥알을 주워 먹으면서 나도 이렇게 컸겠지 생각하면 시골구석의 한귀퉁이에 존재할지라도 더이상 바랄게 없는 여인이 된다.

  소죽쑤는 냄새에 '음매' '음매' 울어대는 누렁소와 자손번창에 여념이 없어 늘 푸른 초원 먹어 대는 토끼들, 지푸라기 한입한입 물고와 집겠다 쫑알대며 날아다니는 제비들, 사탕 보다 더 좋아하는 영아의 친구 멍멍이, 이 모든것들이 자연과 더불어서 내게 주어진 선물이라 여겨져 풀도 뽑고 감자도 심는 일도 마다 하지 않음을 어릴적 그 소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 수필

 

 

 

 

명희, 명금, 안숙이의 우리집

 

 

 

전 현 숙

고흥군 남양면


  대곡리 상와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십여평 남짓한 조립식 건물에 사람들로 부터 소외당한 정신 지체장애자들이 따뜻한 사랑으로 뭉쳐 살고 있다.

  5개월째 10만원씩을 보내오고 있는 독지가와 가족들의 도움, 간간히 보내주는 사람들로 부터의 작은 정성이 세식구 명희, 안숙, 명금이를 별탈없이 살게 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쁘고 반가운 것은 정착하고자 고향을 찾아왔을 때의 마을 사람들의 거센 반발과 냉대가 지금은 가끔 들러도 보고 만나면 위로도 해주는 등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주고 있다.

  나는 일찍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사회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하자고 다짐했고 광주산업대학 1학년때 「행복재활원」에 간것이 계기가 되어 학교를 중퇴하고 정신 지체장애자들을 위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자신과 장애자들과의 벽을 발견했고 사랑을 줄 수 없는 것에 좌절, 6개월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다 다시 찾은 곳이 인천 「예림원」이다. 한때는 7명까지 되었던 이곳은 「예림원」에서 만났던 한 아이의 어머니가 설립해 준것으로 89년에 세워졌다.

  지금은 식구들이 셋 뿐이긴 하지만 힘에 부친다. 언제나 열려있는 문으로 나가 마을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기도 일쑤였고 거부반응을 보여 좌절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체적으로 불구일망정 나에게는 더없이 착하고 정이가는 식구들이고 언젠가는 정상인으로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수필

 

 

 

 

푸른 꿈을 쫙

 

 

 

서 현 숙

해남군 황산면 남리


  5월의 서리는 서툰 꼬마 화가가 초록 물감을 마구 부어댄 것 같다.

  눈부신 오뉴월의 신록이 현기증 난다는걸 안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걸 본 적이 없지만 내가 청소년이었을 때는 4월은 식목의 달이니, 5월은 청소년의 달 하는 제비꼬리 깃을 패용하고 다녔다.

  애국조회 날은 교문에서 부터 유난스레 용의 검사가 심했고 깨끗하고 단정한 단발머리 소녀들이 질서정연하게 사열을 할 때면 휘날리는 “청소년의 달”이란 흰 깃은 꽃가루처럼 빛났다.

  우리네 악동들은 그걸 “청춘의 달”이라고 패용했으나 선생님은 마냥 웃으시기만 했으니 풋풋하고 재치있는 소녀들이 얼마나 귀여우셨을까?

  수업이 끝나도 집에 가질 않고 목련꽃 져버린 잔디에 앉아 단어도 외우고 교실이 떠나가라 박장대소 하던 기억이 새롭다.

  요즘도 5월은 청소년의 달이 틀림없다. 청소년들에게 짜장면 한그릇, 영화표 한장 안주지만 분명 푸른 오월은 청소년의 달이고 그들을 위한 행정을 하고 교육안을 마련한다. 골목마다 단장된 각종 학원들.

  거기에선 지식의 충전을 위해 오직 공부만이 최선이요, 출세의 길임을 지표로 불꽃 튀기는 경쟁을 하고 놀시간, 뛸시간, 생각 할 시간들을 가져간다.

  학교에서도 최고의 지식인들을 만들기 위해 아낌없는 노력을 한다.




 

 ◈ 수필

 

 

 

사람사는 농촌을 꿈꾸며

 

 

 

 

나 수 진

장흥군농촌지도소


  주름살 가득 할머니 한분이 길기에 우두커니 동그밖 길가에 앉아 계셨다. 어디로 가서 씻을까하고 망설이는 나를 보시고서 '우리집으로 가-' 하시며 마치 손녀인양 반겨 집으로 안내해 논에 더러워진 다리와 손을 씻으라 비누며 슬리퍼를 챙겨 가져오신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 띄우는 할머니!

  “할머니 혼자 사세요?”

  “그래요…”

  아들이며 딸들은 많으나 저마다 삭막해진 도심속에 자신의 일에 열중이란다 사람이 그리우셨는지 내 시중까지 들어주시며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마침내 부엌으로 들어 오라며 김에 밥을 싸라 시던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게 전해진다.

  어찌 외롭고 쓸쓸한 노인들의 생활모습이 어제 오는 일이며 그분만이겠는가 만은 새삼 가까이에서 바라본 그분의 모습을 보며 그래도 언젠가는 시원한 평상마루에 손자 손녀 오손도손 모여 모기불 지펴놓고 수박먹던 농촌의 전원과 풍요로움이 시대가 변하여 약간은 다른 모습으로 사람사는 농촌이 될수 있기를…….

  작은 머리통을 붙들고 예습에, 시험 준비에, 과외 학원에, 부지런한 척 해보지만 항상 학교와 공부가 즐거울 수는 없다.

  어떻게 하면 신나게 놀면서 지식도 쌓고 더불어 풍부한 감성과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터득하게 할까?

  오늘도 선생님들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애를 쓰며 머리가 희어질 것이다. 조그만 아이가 방과 후 피아노, 속셈을 가고 또 어떤 애는 주산과 컴퓨터 학원을 간다.

  남이 다그럴지라도 나는 학부모가되면 주관을 갖고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시대의 흐름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전 근대적인 교육방법 같지만 자연 그대로 자라도록 건강을 지켜주며 힘들어 할 때 용기를 주는 부모는 어떨까?

  소화시킬 능력이 안된 아이들에게 부모의 욕망을 억지 부린다면 자녀 사랑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으로 지적인 허영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자식을 낳은 이상 최선을 다해 정상적인 교육을 시켜야 한다. 우리 자녀들의 특기와 취미를 최대한 빨리 발견해 그 기틀을 잡아주는 것이 개인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취미도 없고 자질도 부족한 아이를 특정 과외 학원에서 시달리게 한다면 청소년에 대한 죄악이다. 심하게 극성을 부리고 나또한 그 대열에서 쳐지지 않겠다는 욕심이다.

  덕분에 발달된 교육환경이 되고 잘 이용해서 인재가 나오기도 하지만 건강한 생각과 몸짓으로 자라야 할 청소년들이 자연의 자양분을 먹지 못함 또한 사실이다.

  많은 메스컴에서 용기없는 젊은이들을 비난한다. 나의 출세만을 위해 지식을 쌓고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에 거리에서, 차안에서 부당한 걸 보고도 다치지 않으려 귀찮지 않으려 양심에 커텐을 쳐 버린 청춘들 그들의 소심함이 지식 풍부한 머리에서 나오고 정당한 용기가 잠자고 있었다면 그런 환경을 만들어준 우리 어른들이 볼 일이다.

  원인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기에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그렇게 되도록 내몰아 부친 건 아닌지 그들의 선상에서 성토 됨 또한 당연할 것이다.

  어릴 적에 했던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고무줄을 딸애와 하면서 그 고무줄을 당기고 자르려는 다섯살박이 아들에게도 땅에서도 뛰고 구르는 것부터 익혀 줘야겠다.

  두 팔 활짝 벌리고 맘껏 나풀거리는 군청앞의 싱그런 잎새들 그 신록의 날개짓처럼 우리 청소년들도 벌렁대는 심장 고동 소리에 맞춰 꿈을 쫙 펼 날이 어서 왔으면.




◈ 수필

 

 

 

 

이      사

 

 

 

정 공 례

영광군 법성면 화천


  꿈!

  이제는 시골 아낙이 되어 버려 어린시절 꿈도 거의 잊었지만 한가지 생각나는게 있다.

  「세가지 소원」이란 제목의 동화책을 읽으면서 그려보는 내 소원중 하나가 “트럭에 짐 싣고 친구들에게 손 흔들면서 이사가는 것이었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아버지가 장손인지라 이사라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학교친구나 동네를 뜨는 사람들은 모두가 선택받은 복있는 사람들로 생각했었다.

  이사하는 집이 드물어서였을까? 거의 20여년이 지난 지금 흙을 지켜야 한다고 지금 이 시간도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을 애들 아빠가 장남이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있는지라 이사는 내 평생 한번으로 끝나려나 보다.

  친정집에서 시댁으로의 큰 이사로 말이다. 시집와서 여지껏 살고 있는 천연동은 아담하고 정말로 시골다운 시골이다. 물이 좋고 공기도 맑아 어린이 교육에도 좋고 노인분 건강에도 좋다.

  그런데도 벌써 빈 집이 여러채가 있다. 애들이 숨박꼭질하는 좋은 장소로 이용되고 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석달이 채 못가서 흉가로 변해 버리므로 잘 건사해서 어린이 놀이방이나 학습장으로 꾸몄으면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아마 우리 애들 소원도 어릴적 엄마의 꿈처럼 트럭에 짐 싣고 이사 가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철이 들면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모두들 도시로 가면 누가 대지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인가? 하는 것 없는 아낙이지만 걱정되는 일이다.

  이제 나의 꿈은 이사가는 일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흙을 지키는 애들이 아빠와 함께 든든한 대지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 수필

 

 

 

 

실수 한 토막

 

 

 

최 영 아

승주군 농촌지도소


  어렸을적 내꿈은 학교 선생님이었다. 내가 어렸을때 본 선생님의 이미지가 실수 한번도 안하고 박학다식하며 아무 걱정도 모르는 우리를 가르치는 일이 아마 좋아 보였나보다.

  소꼽장난을 하더라도 나는 학교 선생님을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선생님의 꿈을 엉뚱한곳(?)에서 펼치고 있다. 생활지도사의 호칭이 선생님이라면서 ○ ○ ○ 선생이라고 생활개선부원들이 부르는데 생소할 뿐 만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을 지도해야 한다는 것에 부담감이 갔다.

 주부로선 나보다 몇십년 선배이신 분도 계시고 생활경험이 더 풍부한 분들 앞에서 새로운 정보를 일러주고 지도를 한다는 것이 나를 더 채찍질했다.

  그런데도 실수아닌 실수를 한 것이 있어 부끄럽지만 소개하려 한다.

  올해초 겨울 농민교육 때 식품가공의 안전성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 라면의 유해성을 이야기하면서 될 수 있으면 먹지말라는 강의를 했다. 듣는 분들도 머리를 끄덕이며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교육이 끝나고 점심을 해결해야 되는데 너무 오지라 식당이 없었고 생활개선지도가 미치지 못하여 아는 부녀자도 없어 점심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마을 상점에 들어가 라면이라도 끓여 달라고 부탁을 했다. 우선 허기라도 면해 보려고 한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참 먹고 있으니 조금전 교육 받던 분이 가게에 물건을 사러 왔다가 우리를 보았는데 그때 민망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빨개진다.

  사정얘기를 했지만 학생아닌 선생이 자기가 지도한 내용도 지키지 않고 눈앞에서 어긴 것을 보였으니 그날의 교육효과는 빵점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배가 고프더라도 참았어야 했는데……